1365년(공민왕 14)생으로, 어릴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 반야(般若)의 소생이다. 1371년(공민왕 20)에 신돈이 처형된 후,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모니노를 자신의 아들이라 밝히고 궁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후 모니노를 태후전에서 지내게 하였고 수시중(守侍中) 이인임(李仁任)에게 그를 부탁했다. 1373년(공민왕 22)에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정당문학(政堂文學) 백문보(白文寶) · 전녹생(田祿生), 대사성(大司成) 정추(鄭樞) 등이 왕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1374년(공민왕 23)에 공민왕은 왕우가 죽은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이라 칭하고 한씨의 3대와 외조부를 추증했다.
비(妃)로는 이인임의 조카딸인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이림(李琳)의 딸 근비(謹妃), 최영(崔瑩)의 딸 영비(寧妃) 등이 있다.
1374년 9월, 공민왕이 시해 당하자, 명덕태후(明德太后)와 문하시중(門下侍中) 경복흥(慶復興)은 왕우가 아닌 다른 종실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고,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인임(李仁任)은 왕우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수산(李壽山)은 다른 종실을 왕으로 세우는 쪽으로 의견을 내었으나, 영녕군(永寧君) 왕유(王瑜)와 밀직(密直) 왕안덕(王安德) 등이 공민왕이 왕우를 후사로 삼았다는 점을 내세웠고, 이에 왕우가 왕위에 올랐다.
우왕이 즉위한 후, 국왕이 시해된 상황을 수습하고 10살의 우왕을 즉위시키는 데에 공을 세운 이인임을 중심으로 정국이 재편되었다. 특히 우왕 즉위 초에는 대외 관계와 관련한 갈등이 불거졌는데, 명(明)의 책봉을 받은 공민왕이 시해된 상황에서 1374년 11월 고려에 왔던 명 사신이 귀국 도중 호송관(護送官) 김의(金義)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후 김의는 원(元)으로 도망갔고, 공민왕 사망과 우왕 즉위의 소식을 명나라에 전하기 위해 이들과 함께 이동 중이던 고려 측 사신도 도망하여 고려로 귀국했다. 이러한 가운데 명나라(이후 명)에서는 고려 측의 책임을 물어 고려 측 사신을 거절하며 우왕의 책봉을 거부했다. 이에 이인임은 명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면서도 일단 정국의 안정을 위해 원에도 사신을 보내어 공민왕의 사망을 알렸고, 이어 파견된 원의 사신을 맞이했다. 그러나 정도전(鄭道傳) 등 공민왕 대에 정계에 진출한 신흥 유신들은 원과의 관계를 재개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1375년(우왕 1)에 대거 유배되어 정계에서 숙청되었다. 이후 1377년, 원에서는 우왕을 책봉하는 사신을 파견했다. 이에 고려에서는 원의 연호를 사용했지만, 이후에도 명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 1385년(우왕 11)에 명은 공민왕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우왕을 책봉했다.
1388년(우왕 14) 정월, 우왕은 최영 등의 도움을 받아 전년에 발생한 염흥방(廉興邦)과 조반(趙胖) 간의 다툼과 관련한 옥사(獄事)를 빌미로 이인임, 임견미(林堅味), 염흥방 등 세력을 숙청했다. 2월에는 명에서 철령(鐵嶺) 북쪽의 땅을 요동(遼東)에 귀속시킬 것임을 알리고, 3월에는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고했다. 최영과 함께 요동 공략을 계획하고, 4월에는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요동 정벌을 단행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요동 정벌에 반대하던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해 최영이 실각하고 왕은 폐위되어 강화도에 안치되었다. 뒤에 여흥군(驪興郡)으로 옮겼다가, 1389년(공양왕 1) 11월 김저(金佇)와 모의해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옮겨졌다. 다음 달에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성계 등은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우왕과 그 아들 창왕을 폐하였다. 이때 가짜 왕을 몰아내고 진짜 왕을 세운다는 ' 폐가입진(廢假立眞)'을 공양왕을 옹립하는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고려사(高麗史)』에서도 우왕의 세가(世家)를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傳)」에 편입시켜 「신우전(辛禑傳)」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그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채, 이성계 등의 공양왕 옹립과 조선 건국을 합리화시키려는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