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최씨(崔氏), 본관은 창원(昌原: 지금의 철원)이다. 철원사람이며, 아버지는 문하시중 최영(崔瑩)이다.
우왕이 최영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 시기는 1388년(우왕 14) 3월이었는데 이때는 최영이 우왕을 옹립한 이인임(李仁任)과 그 일파를 정계에서 축출하고 명실상부한 일인집권체제(一人執權體制)를 구축,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우왕은 최영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최영은 그 딸이 정실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왕비의 자격이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우왕의 간곡한 설득에 못 이겨 왕비로 들여보냈다. 이후 우왕은 최영의 집에 자주 내왕하게 되었는데, 이는 최영과의 소원한 관계를 개선하려는 우왕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영비(寧妃)의 혼인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3개월 후인 같은 해 6월,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축출하고 최영을 감금·처형했기 때문이다. 우왕이 강화도에 유배될 때 영비도 함께 따라갔다. 이듬해 공양왕이 즉위한 뒤 우왕은 폐서인(廢庶人)이 되고, 곧이어 처형됨으로써 영비의 위치 또한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왕과 창왕(昌王)은 신돈(辛旽) 의 후손이라 하여 위조(僞朝: 정통을 이어받지 않은 조정)로 폄하됨에 따라 우왕은 반역열전(叛逆列傳)에 수록되고 왕비(王妃)들은 『고려사』 후비전(后妃傳)에 입전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