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고성(固城) 출신으로 판개성부사 이림(李琳)의 딸이며, 창왕의 어머니이다.
우왕은 1379년(우왕 5) 4월, 15세의 나이로 근비를 맞아들였으며, 왕비의 아버지 이림은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어머니 홍씨는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 할머니 이씨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하였다. 근비가 우왕의 제1비로 간택되게 된 것은 당시에 일족인 이인임(李仁任)이 국정을 전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인임은 공민왕이 죽을 당시에 수시중(守侍中)의 위치에 있으면서, 종친 가운데 새 왕을 옹립하자는 의견을 물리치고, 공민왕이 이미 후사로 내정하여 두었던 강녕대군 우(江寧大君禑)를 왕으로 추대하여 정치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족질녀와의 혼인을 주선하여 그의 위치를 안정시켰던 것이다.
근비는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물러나고 아들인 창왕이 즉위한 뒤에 왕대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창왕마저 신돈(辛旽)의 후예라 하여 폐출되고 공양왕이 즉위하는 정치적 격동의 와중에서 이림은 우왕의 복위를 꾀하였다는 죄명으로 충주에 유배되어 병으로 죽고, 우왕과 창왕이 목숨을 잃게 되었으며, 따라서 근비도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고려의 국왕으로 보지 않고 왕위를 찬탈한 위조(僞朝)로 보아 반역열전에 수록하였기 때문에 우왕의 왕비들도 후비전에 수록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