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 최영(崔瑩)의 생질이다.
우왕 때 대호군(大護軍)으로 최영을 따라 오랫동안 군사에 종사하였다. 1389년에 최영의 측근인 전부령(前副令) 정득후(鄭得厚)와 함께 여주에 가서 폐위된 우왕을 만나 이성계(李成桂)를 살해하라는 부탁을 받고 돌아와서 곽충보(郭忠輔)와 모의하여 팔관일(八關日)에 거사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하고는 이성계에게 그 사실을 밀고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성계가 팔관회에 참여하지 않고 집에 있자, 정득후와 함께 이성계의 집으로 잠입하였다가 문객에게 잡혀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
대간의 문책에 따라 변안열(邊安烈)·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우인열(禹仁烈)·왕안덕(王安德)·우홍수(禹洪壽) 등과 공모하여 우왕을 복위하기로 하였다고 자백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우왕은 강릉으로 옮겨지고, 다시 창왕(昌王)도 폐위되어 강화로 추방되었다. 그해 11월 옥에서 죽으므로 그 시체를 저자에서 베었다. 그리고 김저의 모의에 가담한 문하평리 정지(鄭地) 등 27인은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