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배천(白川). 할아버지는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은천군 조하(趙何)이고, 아버지는 호군 조세경(趙世卿)이다. 어머니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양백후(楊伯厚)의 딸이다.
12세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매부인 단평장(段平章)의 집에 있으면서 한문과 몽고어를 배웠다. 이후 원나라 승상 탈탈(脫脫)의 인정을 받아 중서성역사(中書省譯史)가 되었다. 1368년(공민왕 17)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원나라 벼슬을 그만두고 고려로 돌아왔다.
1382년(우왕 8) 판도판서로서 하정사 겸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시호와 승습을 청했고, 돌아와 밀직부사가 되었다. 1385년에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서 시호와 승습을 청하고 돌아왔다. 이 때 조정에서 전횡을 일삼던 염흥방(廉興邦)의 종 이광(李光)이 자기 땅을 빼앗자 이광을 죽였다.
이에 염흥방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이 일은 정치적인 사건으로 발전하여 최영(崔瑩)과 사전 협의를 한 우왕의 명으로 조반은 석방되고 당시 전횡을 일삼던 임견미(林堅味)과 염흥방 일당이 처형되는 무진피화(戊辰被禍, 正月之誅라고도 함.)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뒤 동지밀직사사 · 개성윤이 되었다. 1389년(공양왕 1)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왕의 즉위를 알렸다. 이 때 윤이(尹彛) · 이초(李初) 등의 본국에 대한 무고 사실을 명황제에게 잘 설명하여 의심을 풀게 하였다. 다음해 돌아와 윤이와 이초의 사건을 보고하여 이색(李穡) 등 수십 명이 피해를 당하는 옥사를 일으켰다.
1391년 공전(公田)을 함부로 빼앗아 성헌(省憲)의 탄핵을 받고 관직이 삭탈되어 죽림(竹林)으로 귀양갔으나 곧 풀려나, 1392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복흥군(復興君)에 봉해졌으며,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또한, 백관(百官)의 장문(狀文)을 가지고 조선 개국의 사실을 알리러 명나라에 갔다가 석달 만에 돌아왔다.
1394년(태조 3) 6월 이방원(李芳遠)과 함께 명나라에 표문(表文)을 올렸고, 11월에는 이방원을 수행하여 재차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5년 판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가,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를 거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이르렀다. 1396년과 1397년에도 하정사로서 명나라에 갔으나, 등주(登州)에서 제왕(齊王)의 방해로 다음해에 돌아왔다. 시호는 숙위(肅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