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국공신은 나라를 세우는 데 왕을 도와 공이 많았던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고려가 건국될 때에는 왕건을 추대한 사람들을 3등분하여 포상했다. 일등공신으로는 홍유 등이 책록되었고, 이등공신으로는 권능식 등이 책록되었으며, 삼등공신에는 2,000명이나 책록되었다. 조선에서는 공신도감(功臣都監)을 설치하여 일등공신 16명, 이등공신 12명, 삼등공신 16명으로 모두 44명을 책봉하였다. 이후 8명을 추가하여 개국공신은 52명이 되었다. 1398년 개국공신 1등에 이방원·이방의·이방간을 추가하여 55인으로 확정되었다.
고려 · 조선의 건국 때 있었다. 고려 개국에는 태봉왕(泰封王)이던 궁예를 쳐부수고 왕건을 고려 태조로 추대한 사람들을 3등분해 포상했는데, 그들을 고려의 개국공신이라고 하였다.
고려 개국의 일등공신으로는 홍유(洪儒) · 배현경(裵玄慶) · 신숭겸(申崇謙) · 복지겸(卜智謙) 등이 책록되었다. 이등공신으로는 권능식(權能寔) · 권신(權愼) · 염상(廉湘) · 김낙(金樂) · 마난(麻煖) 등이 책록되었으며, 삼등공신에는 무려 2,000인이나 책록되었다.
조선에서는 개국한 지 한달 뒤인 1392년 8월에 공신도감(功臣都監)을 설치하고, 그 해 9월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신하 중에서 배극렴(裵克廉) 등 44인을 1 · 2 · 3등으로 나누어 책록하고, 그들에게 토지와 노비를 내리는 한편 여러 가지 특전을 부여하였다.
일등공신은 배극렴 · 조준(趙浚) · 김사형(金士衡) · 정도전(鄭道傳) · 이제(李濟) · 이화(李和) · 정희계(鄭熙啓) · 이지란(李之蘭) · 남은(南誾) · 장사길(張思吉) · 정총(鄭摠) · 조인옥(趙仁沃) · 남재(南在) · 조박(趙璞) · 오몽을(吳蒙乙) · 정탁(鄭擢) 등 16인이다. 이들에게는 최고 220결(結)에서 최하 150결에 이르는 공신전(功臣田)을 내리고, 최고 30명에서 최하 15명에 이르는 노비를 지급하였다.
이등공신은 윤호(尹虎) · 이민도(李敏道) · 박포(朴苞) · 조영규(趙英珪) · 조반(趙胖) · 조온(趙溫) · 조기(趙琦) · 홍길민(洪吉旼) · 유경(劉敬) · 정용수(鄭龍壽) · 장담(張湛) · 정지(鄭地) 등 12인이다. 이들에게는 100결의 토지와 10명의 노비를 하사하였다.
삼등공신으로는 안경공(安景恭) · 김곤(金稇) · 유원정(柳爰廷) · 이직(李稷) · 이근(李懃) · 오사충(吳思忠) · 이서(李舒) · 조영무(趙英茂) · 이백유(李伯由) · 이부(李敷) · 김로(金輅) · 손흥종(孫興宗) · 심효생(沈孝生) · 고여(高呂) · 장지화(張至和) · 함부림(咸傅霖) 등 16인이다. 이들에게는 공신전 70결과 노비 7명씩을 각각 지급하였다.
같은 달 을사일(乙巳日)에는 조견(趙狷)을 이등 공신으로, 한상경(韓尙敬) · 임언충(任彦忠) · 황거정(黃居正) · 장사정(張思靖) · 한충(韓忠) · 민여익(閔汝翼) 등 6인을 삼등공신으로 추록(追錄)했으며, 같은 해 11월에 황희석(黃希碩)을 이등공신으로 추록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원년에 개국공신에 책록된 사람은 모두 52인이었다.
1398년 12월, 이방원(李芳遠) 일파가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뒤 실권을 잡자 방원 · 방의(芳毅) · 방간(芳幹) 등 세 왕자를 개국공신 1등에 추록해 개국공신은 모두 55인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그들 중 세 왕자를 제외한 52인의 개국공신은 모두 이성계 추대에 참여한 신하들이지만, 그들이 받은 공신의 등급이 반드시 그들이 실제로 세운 공의 높고 낮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신의 등급은 대체로 직위의 높고 낮음을 기준으로 한 듯하다.
예를 들어 배극렴 · 김사형 등은 이성계 추대에 참여한 것밖에는 별다른 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하성의 고관이라는 점이 고려되어 일등공신에 봉해졌다. 개국공신의 직책을 보면, 높고 낮은 관료가 비교적 골고루 망라되어 있고, 전직 관료도 몇 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문신과 무인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개국공신이 모두 개국의 주역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정도전 · 남은 · 조인옥 · 조준 등 몇 사람은 일찍부터 개국을 모의하고 개혁 운동을 추진한 핵심 인물이다. 정도전은 1383년에 이성계와 만나 처음으로 혁명을 모의했으며, 남은과 조인옥은 우왕 14년의 위화도회군 당시 이성계 추대를 선창했고, 조준은 전제개혁 운동을 주동하였다.
한편, 정몽주 등 개국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데는 조영규 · 조영무 · 황희석 · 고여 · 이부 등 이성계의 부하였던 무인들의 활약이 컸다. 혁명을 발의하고 개혁 방향을 제시했으며, 개국 뒤 새 왕조의 국가 방향을 설정하는 데 가장 공이 큰 인물은 정도전으로서, 그는 한(漢)나라의 장량(張良)에 비유된다.
개국공신은 팔도 출신을 비교적 골고루 망라하고 있으나, 무인은 함경도와 강원도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고, 문신은 조준을 우두머리로 하는 서해안 세력과 정도전을 추종하는 남해안 세력이 중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아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의 하삼도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경상도 출신의 문신 중에는 가문과 신망을 고려해 영입된 인사들이 적지 않다. 개국공신 가운데는 안동 김씨 · 경주 김씨 · 파평 윤씨 · 남양 홍씨 · 평양 조씨 · 성주 이씨 · 의령 남씨 등과 같은 귀성(貴姓)의 후예도 없지 않으나, 약 반수 가량은 가계(家系)와 전력(前歷)이 분명하지 않은 평민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무인들이 그러하다.
또한, 이지란 · 이민도 · 임언충 세 사람은 각각 여진 · 원 · 명에서 귀화해 온 인물이다. 개국공신 중에는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 27인이나 되는데, 그들은 공민왕에서 우왕 때에 이르는 기간에 급제한 신진 정예 유신이라 할 수 있다.
무인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문과에 급제한 정예 유신 중에는 부계(父系) · 모계(母系) 혹은 처계(妻系)에 노비 혹은 서얼의 피가 섞인 인사들이 적지 않다. 정도전 · 조영규 · 함부림 · 조온 · 장담 · 이화 · 조영무 등이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승려로서 환속한 이로는 황희석 · 장담이 있다.
개국공신 가운데는 일찍부터 이성계 집안과 족친 관계를 맺은 가문의 후예들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이제는 이성계의 사위이며, 이직은 이제의 종제(從弟)이다. 이화는 이성계의 서형(庶兄)이며, 정희계 · 심효생 · 장지화는 그의 인척이다. 조인옥 · 조영무 · 조온 등 3인의 공신을 배출한 한양 조씨는 쌍성총관 조휘(趙暉)의 후예로서 이성계 집안과는 이중의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개국공신으로서 정변에 휘말려 피살된 인사로는 정도전 · 남은 · 이제 · 오몽을 · 장담 · 정용수 · 박포 · 이근 · 손흥종 · 심효생 · 장지화 · 황거정 등 12인이었으며, 남재 · 조온 · 한상경의 후손 가운데는 명신들이 많이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