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은 조선전기 판문하부사, 좌정승, 영의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고려말 강릉도 안렴사로서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웠다. 하지만 권신들의 발호에 실망하여 우왕 말년까지 은둔생활을 하며 개혁을 꿈꾸다 이성계와 인연을 맺었다.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했으며, 특히 전제 개혁에 뛰어난 실력을 갖추어 그 분야 개혁에 주력했다. 권신을 탄핵하고 창왕을 폐위,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했으며 이성계를 추대하는 조선 건국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건국 후에는 정도전과 결별하고 이방원과 뜻을 같이했다.
1371년(공민왕 20) 책을 끼고 수덕궁(壽德宮) 앞을 지나가자, 왕이 보고 기특히 여겨 마배행수(馬陪行首)에 보하였다. 1374년(우왕 즉위년) 함과에 급제하고, 1376년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으로서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겸하고, 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로 뽑혔는데, 정치를 잘하여 이민(吏民)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이어 전법판서(典法判書)를 거쳐, 1382년 병마도통사 최영(崔瑩)의 천거로 경상도에 내려가 왜구 토벌에 소극적이던 도순문사를 징벌하고 병마사를 참하여 기강을 바로잡았다. 1383년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뒤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다.
도검찰사(都檢察使)가 된 뒤에는 강원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평하여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에 올랐다. 그러나 권간(權奸)의 발호에 실망하여 우왕 말년까지 4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경사(經史)를 공부하고, 윤소종(尹紹宗) · 허금(許錦) · 조인옥(趙仁沃) · 유원정(柳爰廷) · 정지(鄭地) · 백군녕(白君寧) 등과 교우를 맺으면서 우왕을 폐하고 왕씨 왕족 중 유망한 인물을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이 무렵이다.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중망(重望)이 있는 조준을 불러 일을 논의하고는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知密直司事兼大司憲)에 발탁, 크고 작은 일을 일일이 자문하였다. 이에 그는 크게 감격하여, 아는 것을 모두 이성계에게 이야기하는 등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 해 이성계 · 정도전(鄭道傳) 등과 전제 개혁을 협의, 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찬의를 얻고, 같은 해 7월 처음으로 전제 개혁의 필요성을 상소하였다.
또 다음해 8월과 12월에 잇달아 전제개혁소를 올려 이색(李穡) · 이림(李琳) · 우현보(禹玄寶) · 변안열(邊安烈) · 권근(權近) · 유백유(柳伯濡) 등 전제 개혁 반대파와 대립하였다. 그는 관제 · 신분 · 국방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하고, 지문하부사 겸 대사헌(知門下府事兼大司憲)으로 추충여절좌명공신(推忠勵節佐命功臣)이 되었다.
이어 조민수(曺敏修) ·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을 탄핵하고 창왕을 폐위,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하여 이성계 · 정도전 등과 더불어 중흥공신에 서훈되었다. 1389년(공양왕 1) 전제개혁을 단행하고, 평리 겸 판상서시사(評理兼判尙瑞寺事)에 올라 전선(銓選)을 주관했고, 다음해에는 찬성사로 승진하여 1391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2년 정몽주 일파의 탄핵을 받아 정도전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정몽주가 죽자 풀려나와 찬성사 ·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이 해 7월에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지고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의 자리에 올랐다.
조선 개국 후 정치적 실권이 점차 정도전에게 집중되자, 그와 정치적 의견을 달리하게 되었다. 세자책봉에 대해 정도전은 이방석(李芳碩)을 지지했으나, 조준은 이를 반대하여 개국에 공이 많은 이방원(李芳遠)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문하좌시중 · 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면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요동공벌을 계획하던 정도전과 대립하여 공요운동(攻遼運動)을 반대하였다.
조준의 정치적 입장은 자연히 이방원과 가까워져서 그와 친교가 두터웠고, 평소 방원에게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주고 읽기를 권장하였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戊寅靖社, 혹은 鄭道傳亂) 때 백관을 이끌고 적장(嫡長)을 후사로 정할 것을 건의한 후,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400년(정종 2)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있으면서 민무구(閔無咎) · 민무질(閔無疾)에게 무고되어 한때 투옥되기도 했으나, 이방원에 의해 석방되어,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하고 좌정승 · 영의정부사에 승진, 평양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조준은 사학(史學)을 잘하고 경학(經學)과 시문에도 능했으며, 문집으로 『송당집(松堂集)』을 남겼다. 한편, 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에게 국조의 헌장조례(憲章條例)를 모아 『경제육전(經濟六典)』을 간행하게 했으니, 이는 뒤에 『속육전(續六典)』 · 『육전등록(六典謄錄)』 등으로 보완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의 토대가 되었다.
전제개혁안은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에 목표를 둔 것이었다. 즉, 제1차 상소에서는 녹과전(祿科田) · 구분전(口分田) · 군전(軍田) · 투화전(投化田) · 외역전(外役田) · 위전(位田) · 백정대전(白丁代田) · 사사전(寺社田) · 역전(驛田) · 외록전(外祿田) · 공해전(公廨田) 등의 설치를 통해 관리와 군인 그리고 국역담당자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제2 · 3차의 전제개혁상소에서는 세신거실(世臣居室)이 경기 이외의 외방에까지 사전(私田)을 두려는 움직임을 저지하고, 기내사전(畿內私田)의 원칙을 고수, 전제개혁의 지역적 안배를 설정하였다.
1391년 5월에 정해진 과전법은 그의 개혁안이 토대가 된 것이나, 구분전 · 투화전 · 백정대전에 대한 분급규정(分給規定)이 빠져 있고, 그 대신 중흥공신전의 세습에 대한 규정이 첨가되었다.
그가 여말에 올린 국정개혁안은 『주례(周禮)』에 바탕을 둔 것으로 광범위한 사회개혁안을 포괄하고 있다. 즉, 총재(冢宰, 재상)의 권한을 강화하고, 대간과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며, 양천신분제(良賤身分制)를 확립하여 국역체제를 강화하고, 경연과 서연제도를 실시하며, 학교(향교)제도를 강화하여 사장(詞章)을 폐하고 사서오경을 배우도록 할 것,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시행할 것, 의창(義倉)과 상평창(常平倉) · 사창(社倉)의 법을 시행할 것, 향리의 출사(出仕)를 억제할 것, 환자(宦者)의 정치 참여를 막을 것, 과거시험에 복시제(覆試制)를 시행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관제 및 사회개혁안은 정도전의 그것과 상통하는 점이 많으며,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및 『경제문감(經濟文鑑)』의 편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