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전기에는 병종(兵種)에 따라 군인에게 지급해 그 수확으로 군사 비용에 충당하던 전지(田地)를 군인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391년(공양왕 3)에 공포된 과전법(科田法)에서는 지방에 거주하던 전직 관리나 일정한 직무가 없던 관리인 한량관(閑良官)에게도 군전을 지급하도록 규정했다. 전형적인 사전(私田)에 해당한다.
군인전은 998년(목종 1)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에서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1076년(문종 30)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에서 그 지급량이 다시 조정되었고, 고려 후기에 이르러 일률적으로 17결을 지급하였다. 고려 목종 때 개정전시과에서는 세 집[三家]을 하나의 군호로 편성하고, 1군호에 전시과 체제에 따라 군인전을 지급하였다. 부병제의 원칙에 입각해 일부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대신 나라에서는 별도로 군사 비용을 마련하지 않고 그 수확으로 군호의 생계 유지와 군사 비용을 충당했다. 고려 중엽 이후 군인전은 권세가들의 침탈 대상이 되면서 군역과 관계없는 유명무실한 토지가 되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대토지 겸병과 농장의 발달로 인해 군인전 또한 다른 농민들의 경작지와 함께 권문세가에 의해 독점을 당하게 되었다. 1388년(우왕 14) 조준(趙浚)을 중심으로 한 전제 개혁론자들은 원래의 군인전을 회복시키려 하였다. 군인의 재예(才藝)를 시험해 여기서 선발된 자에게 ‘20세에 군전을 지급하고, 60세에 환수한다.’라는 원칙을 세우려 하였다.
1391년 공포된 과전법에서는 지방의 한량 관리에게 원래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량에 따라 품계에 구애받지 않고 5결 또는 10결을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서울에 와서 시위하는[거경시위(居京侍衛)] 자는 유향품관(留鄕品官)으로 과전이 지급되었고, 시위를 하지 않는 지방 한량관에게 군전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 중에서 5결 또는 10결을 제외한 나머지 토지는 몰수하였다. 군전을 지급받은 한량관들의 숙위는 병역인 동시에 명예였다. 군전을 지급받은 한량관은 일반 정병과는 다른 상층 군인이었으나 한편으로 지방 유력자인 한량관을 중앙 정부의 통제 아래에 두기 위한 조처였다.
조선시대에 군전은 1391년 과전법 실시 당시 그 지급이 끝났기 때문에, 회수와 신급(新給)에 관한 규정이 있었으나 실제로 회수와 신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394년(태조 3) 재예를 시험해 선발된 한량관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도록 개정하였다. 단, 일정한 임무를 맡지 않은 자는 토지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또한, 1409년(태종 9) 군자전(軍資田) 확대 시책과 시위제도(侍衛制度)의 변화 및 병종의 신설 등으로 1391년에 지급된 군전조차 몰수해 군자전에 편입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군전은 세종 때에 이르러 사실상 거의 소멸되었고, 세조 때 직전법(職田法) 실시 이후 제도적으로도 완전히 소멸되었다.
고려의 군인전과 조선시대 과전법하에 있어서 군전의 차이점은, 첫째 군사 비용의 조달 방법으로 고려시대에는 전적으로 군인전에 의존했던 반면, 과전법하에서는 군자전을 별도로 설치해 군량을 확보하려 했던 점이다. 둘째 군인전은 양인(良人) 농민에게 지급된 토지인 반면, 군전은 지방의 유력자인 한량에게만 지급된 토지로 양인은 토지의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었던 점 등이다. 처음에는 국역부담자(國役負擔者)에게는 누구나 토지를 지급하려 하였다. 그러나 토지의 분급 대상은 많고 실제 경작지는 부족한 상황이어서 군량 확보와 관리들의 녹봉 해결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결국 정부는 국가 재정 수입원인 공전(公田) 확보에 주력하고 양인은 토지 지급 대상에서 제외했던 것이다. 군전 자체도 한량에 대한 국가 정책의 변화와 군역 제도의 정비, 공전의 확대 정책으로 직전법 시행을 전후하여 소멸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