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품관(土姓品官) 또는 재외품관(在外品官)이라고도 한다. 품관이란 원래 품계만 있고 직사(職事)가 없는 자, 산계(散階)만 있는 자, 즉 유품관(流品官)을 의미하였다. 고려 말 군공(軍功) 등에 의한 검교직(檢校職) · 첨설직(添設職)의 남발에 따라 품관이 대량으로 배출되었다.
조선왕조가 개창됨에 따라 새로운 집권자들은 정치적 목적에서 5∼10결의 군전(軍田)을 품관층들에게 주는 대신 거경시위(居京侍衛)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거경시위의 괴로움은 품관들의 거경시위를 꺼리게 하였다.
그 뒤 왕권의 안정으로 거경시위의 의무가 완화되어 품관들은 향촌에 머무르며 유향품관화하였다. 이러한 경우, 향촌의 사류(士類)를 ‘유향품관’ 또는 ‘품관’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유향품관들은 유향소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그 지역 출신 재경관인(在京官人)들의 조직인 경재소(京在所)와 상호관계를 가지면서 자치적인 향촌 지배질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1603년(선조 36) 경재소가 혁파되고, 향청(鄕廳)의 좌수 · 별감도 비록 향천(鄕薦)을 거치기는 했지만 그 임명권이 경재소에서 수령에게로 넘어갔다. 또한 수령의 보좌 · 자문 기능을 가졌던 좌수 · 별감 등 향임(鄕任)의 기능도 1654년 「영장사목(營將事目)」이 반포된 이후 수령의 하수기구(下手機構)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중앙 관직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던 사족층들은 향임을 기피하였다. 대신에 향족들만이 향임층을 계속하게 됨에 따라 유(儒) · 향(鄕)이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때의 품관은 향임층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조선 후기에 경상도 안동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유향분기 현상이 나타났다.
유향품관들은 향촌사회의 지배층으로서, 한편으로는 유향소 · 향약 · 향회 · 동약 등의 기구와 조직들을 통해 향촌사회를 지배하고 향촌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토호적 존재로서 하민(下民)들을 탈법적으로 지배하고, 민전을 겸병하며, 부역이나 환곡을 물지 않고 천택(川澤)의 이익을 독점하는 등 불법을 저질렀다. 심지어 왕권을 대행하는 수령 및 관인(官人)들과 대립해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