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에 설치된 유향소(留鄕所)를 임진왜란 이후 대개 향청이라 불렀다. 조선 초기의 유향소는 고려시대의 사심관제(事審官制)가 부활된 것으로서 향촌 사회의 자치적 기구라 할 수 있다.
본래 설치 목적은 지방의 악질 향리(鄕吏)를 규찰하고 향풍(鄕風)을 바르게 하는 등 향촌교화(鄕村敎化)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위엄을 세우는 기관으로 변해 작폐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수령권과의 충돌로 여러 차례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士林派)가 정계에 진출하면서 1488년(성종 19)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자기들의 세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다시 설치하였다.
다시 설립된 유향소는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실시하는 기구로서 기능하였다. 또한 향촌내의 불효·부제(不悌 : 연장자에 대한 예를 벗어남)·불목·불임휼(不任恤 : 구휼의 임무를 소홀히 함)한 자 등 향촌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을 통제해 향촌 교화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중앙의 현직 관리로 경재소당상(京在所堂上)을 삼아 그들의 입향(入鄕) 유향소의 좌수(座首)를 임명하게 하고 통제하도록 함으로써 훈구파(勳舊派) 재상들이 대부분의 유향소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따른 비리가 속출하였다.
그리하여 훈구세력이 자연 도태되고 사림이 중앙 정계를 완전 장악한 선조 때부터 정비를 가해 마침내 1606년(선조 36) 경재소를 혁파하였고 좌수 임명권도 수령에게 넘겼다.
이로써 유향소는 그 성격이 크게 달라져 수령 휘하에서 그를 보좌해 행정 실무의 일부를 집행하는 기구가 되었다. 이때부터 명칭도 향청 또는 이아(貳衙)라 하였으며 좌수는 수령의 수석보좌관이 된 셈이었다.
이제 좌수는 면·이 향임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각종 송사를 처리하며 환곡을 취급하는 등 지역 민생의 안위를 좌우하는 중요한 임무를 띠게 되었다.
효종 때부터 향청 좌수에 대한 처우를 향리로 격하시키자 문벌을 자랑하는 집안에서는 좌수 취임을 사양하였다. 따라서 향리 대접을 감수하면서도 실리를 추구하려는 향원(鄕員)이 아닌 자들이 향청을 차지하였으니 이들을 비향원 향족(鄕族)이라 하였다.
그러나 지방 토호들은 의중의 인물들을 향소(鄕所)로 추천, 임명하게 하여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향족이나 향리들도 교체가 빈번한 수령보다 이들 원향(元鄕 : 지방에 붙박이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토호)들을 두려워해 지방 세력은 강하게 지속되었으며, 중앙 정부의 제시책을 부정한 방법으로 침식해 공동화(空洞化)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