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향소는 조선 초기에 악질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기 위해 지방의 품관들이 조직한 자치기구이다. 고려 말 향리 신분으로 군공을 세워 관직을 얻거나 조선 건국 과정에서 중앙관계에 진출했다가 다시 향촌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품관이라 하였다. 이들이 향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들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조직한 것이 유향소이다. 품관들이 수령을 능멸하는 등 폐단이 있자 중앙집권책의 일환인 수령권이 강조되면서 태종 때에 혁파되었다가 세종 때 다시 부활하였다. 이후 부침을 거듭하다가 향청으로 정립되어 향촌질서 확립과 향풍진작 기능을 수행했다.
향사당(鄕射堂) · 풍헌당(風憲堂) · 집헌당(執憲堂) · 유향청(留鄕廳) · 향소청(鄕所廳) · 향당(鄕堂) 등으로도 불린다. 그 시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시대의 사심관(事審官) 제도를 모방해 고려 말과 조선 초 지방 군 · 현의 유력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기에 향리 신분으로서 군공(軍功)으로 첨설직(添設職)을 얻거나, 조선 건국과 더불어 중앙관계에 진출해 관원이 된 자들은 중앙에 머무를 필요성이 없어졌을 때 향촌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들은 유향품관(留鄕品官)으로서 아직도 향리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류와 자신을 구분하려 하였다. 그리고 예전처럼 계속 향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면 그들 자신이 중심이 된 기구를 만들어야 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향소이다.
유향소의 이들 유향품관들은 품계상으로는 수령보다 높은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조선 건국 초에는 수령 대부분의 자질이 낮아서 그들이 수령을 능멸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그리하여 중앙집권책의 일환으로 수령권이 강조되면서 1406년(태종 6) 유향소를 혁파하였다. 이를 대신해 각 고을에 유향품관으로 1인의 신명색(申明色)을 두어 지방 사정에 익숙하지 못한 수령을 돕게 하였다. 나아가 이들에게 수령의 비행을 직언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러나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신명색이 수령을 능멸하는 일이 잦고 민폐가 심하여 1417년에는 이 또한 혁파하였다. 신명색을 혁파함으로써 중앙집권의 확립에는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수령의 불법행위, 향리들의 폐단 등은 향촌사회의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종전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수령에 대한 고소 금지와 「유향소작폐금방절목(留鄕所作弊禁防節目)」을 반포하였다. 1428년(세종 10) 다시 유향소를 부활시켰다.
이 때 반포한 「유향소부설마련절목(留鄕所復設磨鍊節目)」에는 부(府) 이상 5인, 군(郡) 4인, 현(縣) 3인의 유향품관을 각 경재소(京在所)가 선정해 그들이 유향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때 유향소는 활리(猾吏) · 간민(姦民)을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는 일만 전담하도록 하였다. 1435년에는 경재소제도를 정비해 현직 관원이 아버지의 내외향(內外鄕), 어머니의 내외향, 처의 내외향, 할아버지의 외향, 증조부의 외향 등 8향의 유향소를 장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유향소에 대한 이런 제도적 견제로 말미암아 유향품관들은 자기 보호를 위해서 관권과 타협하고 순종해 갔다. 이러한 경향은 또한 양자의 상호보호적 불법행위를 초래해 향촌 질서를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세조 말 경 유향소는 재차 혁파를 당할 운명에 놓인다. 이전처럼 수령을 능멸하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수령과 한편이 되어 백성을 괴롭히기 때문이었다. 유향소가 다시 폐지된 후 간리(姦吏)들의 농간이 심해 향풍이 어지러워지자 1482년(성종 13) 2월에 이조에서 유향소 설치를 아뢰자 윤허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유향소는 활리 · 간민을 규제하고 중앙집권체제의 보조적 기구로서의 소임보다는 향사례(鄕射禮) ·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실시하는 기구로서의 기능이 중시되었다. 또한 향촌 내의 불효 · 부제(不悌: 형제 간에 자애와 공손이 없음) · 불목(不睦: 일가 사이에 화목하지 않음) · 불인(不婣: 서로 반목해 혼인하지 않음) · 불임휼(不任恤: 재난을 구제하는 임무를 수행하지 않음)한 자 등 향촌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을 통제해 향촌 교화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사림파(士林派)는 중앙 정계로 진출하면서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유향소를 경재소와 밀접하게 관련시켜 놓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사림파 지지세력이 강한 영남의 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훈구파(勳舊派) 재상들이 대부분의 유향소를 경재소를 통해 장악하였다. 이에 반발해 사림파의 생원 · 진사들은 따로 사마소(司馬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향소에 적임자가 없어 훼방하고 싸워 민폐가 크고 풍속이 불미스러우니 혁파하자는 주장이 대두하였다. 그리하여 그 성격이 서서히 변질되어 갔고 명칭도 향청(鄕廳)으로 불렸다.
유향품관은 비록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나 좌수(座首) · 별감(別監)이 될 수 있는 자격을 향안(鄕案)에 등재된 인물만으로 국한하는 등 폐쇄적인 성격을 보였다. 그러나 초기의 향촌 질서 확립 및 향풍 진작에 크게 기여하였다. 유향소품관은 처음에는 부 이상 5인, 군 4인, 현 3인이었다가 성종 때는 부 4인, 군 3인, 현 2인이었다. 후기에 와서 현은 1인을 늘려 3인이었으며, 좌수 1인, 별감 2인의 3인을 삼향소(三鄕所)라고 하였다. 유향소 · 삼향소는 모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청사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청사는 처음에는 관아와 멀리 떨어져 있어 이아(貳衙)라 불렀는데, 19세기는 대개 관아 구내에 위치하였다. 이는 초기에 수령을 규제할 힘을 지녔던 유향소가 후기에는 수령보좌역의 기능밖에 하지 못한 것을 보여 준다. 무오사화 때 희생된 권오복(權五福)의 기록에 의하면, 예천의 향사당은 서쪽 경치 좋은 곳에 있었으며, 좌우서(左右序) 포주(庖廚)를 합쳐 20칸이었다. 부로(父老)들이 출자하고 군수도 협력해 지은 기와집이라고 하였다.
한편, 주방이 딸린 것을 보면 이곳이 향임들의 일상적인 집무소였음을 알 수 있다. 규모는 곳마다 달랐으나 보통 10∼20칸이었다. 좌수 · 별감 · 창감(倉監) · 감관(監官) 등 임원이 있고, 그 밑에 소리(所吏) · 사령(使令) · 소동(小童) · 식모 등이 있어 그 인원은 보통 10∼30인이었다. 또, 이곳은 매월 육아일(六衙日: 매 5일)에 정기적으로 관아를 내왕하는 면리(面里)의 관계자들이 쉴 겸 들르는 곳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지방에는 각 지역마다 지역사회의 지배층인 현족(顯族)으로 구성되는 계(契)가 있었다. 그 구성원을 향원(鄕員)이라 하였다. 향원의 명부를 향안이라 하며, 향안에 오르는 것은 내외 혈통에 하자가 없어야 하는 등 무척 어려웠다. 향원 중에서 덕망 있고 나이 든 사람을 향헌(鄕憲: 鄕先生 · 鄕大夫라고도 함.) · 향유사(鄕有司) 등으로 뽑았다. 이들은 계의 임원으로서 향집강(鄕執綱)이라 하였다. 그런데 유향소 좌수는 계를 대표하는 기관이 아니라 계의 집행기관으로서 향집강 등의 감독을 받았다. 향원들 사이의 규약을 향규(鄕規)라고 하였다. 향규는 후기의 향약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그 대상이 대체로 향원에 한정된 것이 다르다. 또한 향안 입록절차, 향헌 · 좌수 선출절차, 향임의 소관업무, 향임은 향원만이 맡을 수 있다는 점 등을 규정한 것이 다르다.
좌수는 향원들의 모임인 향회(鄕會)에서 권점(圈點: 후보자 이름 위에 점을 찍는 것)해 다수결로 선출하며, 그 결과를 올리면 경재소당상이 임명하였다. 그 후보자는 문벌 · 역량이 있어야 했고, 별감은 30세 이상, 좌수는 50세 이상을 뽑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대동유사(大同有司) · 감관 · 약정(約正) 등 향임 중에서 별감으로 승진하고 사무에 숙달한 뒤 좌수로 승진하였다. 좌수 선임방법은 지역마다 달라서 향선생이 임명하는 곳도 있고, 안동부(安東府)처럼 임기를 마친 전임 좌수가 후임을 택정하기도 하였다. 후기에는 수령이 임명하는 형식이었으나 향전(鄕戰)이 심하지 않은 때는 수령의 임명장, 즉 차첩(差帖)은 절차상으로만 필요했고, 실제로는 그대로 선출되었다.
별감 · 관감 · 풍헌 등 향임도 형식상 수령의 차첩이 필요했으나 실제로는 좌수가 임명하였다. 향청에는 삼향소 외에 10∼50여 명의 인원이 있어 환정(還政)을 비롯한 제반 사무를 보았다. 풍헌 이하의 면임 · 이임은 좌수가 임명하되 면내의 문보(文報: 문서와 관보) · 수세(收稅) · 차역(差役) · 금령 · 권농 · 교화 등 모든 대민 행정실무를 주관하였다. 약정은 부헌(副憲)으로, 풍헌 유고 시 그를 대리하는 제2인자였다. 관감 등 향청 임원은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아전들을 나눠 감독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수령이 갈리면 별감이 관아의 이방이 되며, 향집강이 이방 · 호방을 천거해 임명하게 하는 등 향청에서 작청(作廳: 官衙를 말함)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또, 산송(山訟)이나 군역 · 부역에 관한 송사도 향청이 맡아 처리해 수뢰(收賂)와 환곡 조작 등 부정이 많아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