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전은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 정치 · 사회 ·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발생한 분쟁이다. 시기와 지역 특성에 따라 전개 양상이 달랐는데, 18세기 전후 정치 · 사회 · 경제적 변화로 사족 내부 분열과 하층민의 도전이 심화되었다. 주체별로 사족 및 이향 간, 적서 및 신 · 구향 간, 사족과 수령의 대립 등으로 구분된다. 내용별로 향안 입록과 향임의 선임, 서원 · 사우의 배향 · 추향 및 위패의 서차, 학통과 사우 연원, 문집 간행과 문자상의 시비, 전답 · 묘산, 제언과 보, 속사의 축조 및 사용권 문제 등이 확인된다.
조선 후기 재지사족(在地士族)은 향안(鄕案)을 바탕으로 유향소(留鄕所)를 장악하고 지역의 부세(賦稅) 운영과 인사권을 통해 이민(吏民)을 통제하였다. 또한, 향교와 서원을 장악하여 향론을 주도하고, 향약과 동약, 동계 등을 통해 향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였다. 이를 통해 수령과 일정한 타협을 이루면서 재지사족의 이해를 관철시켜 나갔다.
그러나 18세기를 전후하여 중앙의 당쟁이 향촌 사회에 영향을 미치면서 사족 내부의 분열이 심화되고 하층민의 도전도 활발해졌다. 또한, 국가의 각종 통제책은 사족의 지위를 더욱 위협하여 결국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 질서는 붕괴되어 갔다.
이처럼 향전은 17~19세기까지 나타났던 정치 · 경제 · 사회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기존 재지사족들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그 틈을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그렇기에 시기와 지역의 특성에 따라 전개 양상이 달랐다. 이로 인해 연구자들마다 그 주체와 내용의 범위를 달리 보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주체별로는 사족과 관(官)을 배경으로 한 향족(鄕族) · 향품(鄕品)과의 대립, 혹은 향품 간의 대립, 유향(儒鄕)의 대립, 사족 간의 대립, 이족(吏族) 간의 대립, 사족과 이족 간의 대립, 적서(嫡庶) 간의 대립 등으로 구분한다.
내용별로는 정치 · 사회적으로 향안 입록(入錄)과 향임(鄕任)의 선임 문제, 서원 · 사우의 배향(配享) · 추향(追享) 및 위패의 차례 문제, 향권과 관권의 충돌, 학통(學統)과 사우연원(師友淵源) 문제, 문집 간행과 문자상의 시비 등이 있다.
경제적으로는 전답 · 묘산(墓山) · 속사(屬寺)의 소유와 사용권 문제, 제언(堤堰)과 보(洑)의 축조 · 사용권 문제를 두고 씨족 · 촌락 간의 분쟁 등이 있다. 경제적 측면은 모두 향전으로 보긴 어렵지만 대립 주체에 따라서 고을 전체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양반 지배 체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향안 입록과 향임 선발을 둘러싼 향전은 일반적으로 일어났다. 먼저 향안 입록을 둘러싼 향촌 사회의 대립 양상을 보면, 향안 입록의 기준이 지역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부 · 모 · 처의 가계에 문제가 없는 세족(世族)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경주의 경우 형제가 많을 경우 2명까지만 입록을 허용하는 등 실제 사족임에도 향안에 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족들의 지배 질서가 강한 곳은 향안의 입록에서 배제되었던 사족 가문들이 새로 향안에 입록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이들이 신향(新鄕)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새로운 계층의 인물이 신향으로 진입하는 현상이 확산되어 갔다. 반면 작은 규모의 고을은 주로 사족들의 지배 질서가 약한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새로운 세력인 신향의 등장이 보다 빨랐다.
일례로 안동과 같이 사족의 영향력이 강한 곳은 1744년(영조 20) 향안에 서얼(庶孼)의 입록도 허용하라는 왕명까지 내려졌지만 정조 대까지도 타읍과는 달리 안동에서는 서얼 허통(許通)이 안 되었다. 그만큼 18세기 중반까지도 일부 고을에서는 유력 사족의 적자가 아닌 서얼이나 기타 새로운 세력이 향안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그로 인해 향안의 입록을 두고 향촌 사회에서 분란이 생겼다. 여기에는 조정에서의 당파적 입장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컸기에 향안을 둘러싼 쟁단(爭端)이 당파적 갈등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함양에서는 사족들이 남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어 대립이 격화되면서 1824년(순조 24) 향안에 입록된 가문 중 6가문에서 선조의 이름까지 할거(割去)해서 별도의 향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다수의 고을에서는 서얼들의 허통이 진행되면서 향안이 별의미가 없는 것으로 되어갔다. 그래서 17세기 말 18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대부분의 지역에서 향안이 더 이상 추가로 작성되지 않았다. 존속하는 경우라도 그 성격은 이전과는 달랐다. 따라서 향인 입록을 원하였던 서얼층도 점차 향안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19세기까지 향안 작성이 지속되더라도 서얼의 입록을 놓고 대립이 일어나 결국 그 입록이 중단되었다. 이처럼 향안을 둘러싼 대립도 거슬러 올라가면 재지사족 사이의 가문별, 당파별 대립이 격화되면서 일어난 것이었다. 결국 사족 지배 질서의 상징인 향안도 18세기 중반 이후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향임을 둘러싼 향전을 보면 향안을 둘러싼 신(新) · 구향(舊鄕)의 대립에서와 같이 기존 사족과 새롭게 사족으로 상승하는 세력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재지사족은 유향소를 통해 부세 운영과 향임 [좌수 · 별감] 등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고서 향리와 일반민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또한, 관권과 일정하게 타협을 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이래로 수령의 향촌 통제력이 강화되고 향촌 담당 세력도 그동안 향임을 장악하고 있던 사족에서 이향(吏鄕)층, 즉 서리(胥吏), 군교(軍校), 요호부민층(饒戶富民層)으로 변하였다. 이들과 같이 새로이 대두하여 향안에 입록된 자를 종래의 사족인 구향에 대비하여 신향이라 불렀다.
중앙 정부 및 수령도 새로운 동반자로서 신향을 권력 구조 안에 끌어들이게 되면서 신 · 구향은 향권을 쟁탈하려는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종래 사족만으로 구성되었던 향청(鄕廳)에 참여하여 향임을 둘러싸고 구향들과 대립하였다.
반면 영남은 다른 지역과 달라서 재지사족이 강성한 곳이 많았다. 그래서 유향소의 좌수 · 별감은 사족이 담당했는데 그만큼 사족과 향족의 차별 구조, 즉 유(儒) · 향(鄕) 또는 유(儒) · 품(品) 분기가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면임(面任) · 이임(里任)과 같은 하위의 향임은 기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영남에서도 향임을 둘러싼 신 · 구향 간의 향전이 증가하였다. 그 결과 19세기 중엽을 전후로 신향 및 향리가 수령과의 제휴 아래 향촌 사회를 관장 · 주도하는 새로운 체제가 널리 성립되었다.
한편, 19세기 말에는 사족층뿐만 아니라 이서(吏胥)층에서도 파벌을 형성하여 향전이 발생하였다. 1888년(고종 25) 함양 지역에서는 이방(吏房) 차임 및 부세 구조의 장악을 둘러싸고 사족뿐만 아니라 이족(吏族)들이 거주지를 중심으로 남당과 북당으로 갈라져 읍권(邑權)을 다투었다. 이들의 대립은 더욱 치열해져서 마침내 1894년(고종 31) 민란으로 발전하였다.
조선 후기 수령권 강화와 함께 사족의 지배 기반이 약화되고 유향소와 향안이 점차 불필요해지자 사족들은 지역 공론을 모으고 그들의 입지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을 중시하였다. 이에 따라 향전의 주된 장소가 향교와 서원으로 옮겨갔다.
향교, 서원에 대해서도 기존의 사족뿐만 아니라 신향이 함께 참여하기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실제 1747년(영조 23) 영덕(盈德) 옥사(獄事)에서는 “향교 · 서원에 출입해야 양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쟁탈전이 벌어졌다.”고 그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18세기 이래로 서원과 향교의 입적 여부가 사족 유무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 것이다.
관학인 향교는 관권(官權)이 개입할 여지가 컸기에 신향들의 입록과 교임(校任) 진출이 서원에 비하여 수월하였다. 하지만 영남에서는 기존의 사족 가운데 노론화한 세력이 신향들과 연합하여 종래의 남인계 사족들과 교임직을 두고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이런 진통을 겪은 결과, 수임(首任)직은 사족들이 담당하도록 확정되었지만 재지사족의 세력이 약한 곳에서는 수임도 신향들이 담당하였다.
사학인 서원은 상대적으로 관권의 개입이 적었다. 하지만 18세기 초반 안동 김상헌 서원이나 경주 인산서원 훼철과 같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수령과 사족 내지 사족과 사족 간의 대립이 발생하였다.
서원을 둘러싼 향전은 한 고을 내에서 가문 간의 기득권 다툼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회적 위상이 높은 곳일 경우 사안에 따라서 도 전체나 전국에 영향을 주었다. 향전은 제향인의 학문 연원, 원임(院任) 선발, 원생(院生) 입록, 서적 간행에 따른 문자 시비, 경제적 기반을 둘러싼 시비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특히, 학문 연원과 관련해서는 제향인과 서원 및 후손 · 문인들이 관여되었으므로 더욱 치열하였다. 게다가 제향인이 문묘종사 대현일 경우 전국적으로 그 파장이 일었다. 19세기 중반 이언적(李彦迪)의 학문 연원을 두고 발생한 옥산서원의 여주이씨와 동강서원의 경주손씨 사이의 향전은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지면서 도내로 확산되었다.
서원 운영과 관련한 원임 · 원생의 선발에 신향들의 진출이 확대되고 관권이 개입하면서 대부분의 서원에서는 18세기 중반 이후 허통이 되었다. 하지만 영남을 대표했던 옥산서원 · 도산서원의 경우에는 19세기 말까지 신향들의 원임직 진출을 두고 치열한 대립이 이어졌다.
18세기 이래로 향교와 서원을 막론하고 경제적 기반을 둘러싼 분쟁이 자주 발생하였다.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1724년(영조 즉위년) 하양 환성사를 속사로 점유하기 위한 하양향교와 영천 임고서원의 향전은 관 · 향교 · 서원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면서 관찰사가 체직(遞職)되고, 영천군수도 파직되는 등 중앙정부에까지 알려진 사건이었다.
한편, 서원에서의 대표적 향전으로는 위차(位次) 시비가 있다. 18세기 이후 서원 남설(濫設)로 조정에서 서원의 신설을 금지하자 기존의 서원에 함께 제향하면서 위차 시비도 증가하였다. 하지만 금령 이전에도 서원을 건립하면서 비슷한 지위의 인물을 제향하면서 시비가 발생하였다.
특히, 학통(學統) 및 제향인의 가격(家格)과 연계되면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는 19세기 영남을 양분하였던 안동의 병호시비(屛虎是非)가 있다. 17세기 초반 이황을 제향한 여강서원에서 김성일과 유성룡의 위차를 두고 벌어졌던 두 인물의 문인들과 가문의 갈등은 당시 정경세의 중재로 봉합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 재현되었을 때에는 양 가문에서 각기 병산서원과 호계서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하여 학통과 향권을 둘러싸고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그 여파로 안동과 영남의 재지사족이 양분되었는데, 19세기 말까지 대원군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대립은 해결되지 못하였다.
이처럼 향전은 향촌 사회에 존재했던 다양한 세력들의 기득권을 둘러싸고 발생하였다. 또한, 분쟁의 사안이 미치는 파급 범위와 분쟁 주체의 사회적 지위 등에 따라서 한 고을에 국한되거나 도내 혹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