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호시비는 1620년(광해군 12) 여강서원(후에 호계서원)에 배향된 이황의 제자 김성일과 류성룡 위패의 위치를 두고 안동을 비롯한 영남지역 유림들이 병파와 호파로 나뉘어 대립한 분쟁이다. '병'은 류성룡 계열의 병산서원이고 '호'는 김성일 계열의 호계서원을 뜻한다. 위패의 위치는 제자로서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으로 병파는 직위를, 호파는 나이를 내세우며 동쪽을 주장하였다. 이후로도 여러 사안으로 분쟁이 이어지다가 2013년 호계서원 복원사업을 계기로 동쪽에 류성룡, 서쪽에 김성일의 위패를 모시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1620년(광해군 12) 여강서원을 건립하면서 발생한 유성룡과 김성일의 배향(配享) 때 위차(位次) 시비를 계기로 안동을 비롯한 영남 유림들이 병파(屛派)와 호파(虎派)로 나뉘어 전개된 향전(鄕戰)이다. 1620년 이황(李滉)을 주향으로 모신 여강서원을 건립되면서 이황의 대표적인 제자인 유성룡과 김성일의 배향이 결정되었는데, 이때 양인의 위패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제기되었다. 정경세의 자문을 받아 유성룡을 동쪽에, 김성일을 서쪽으로 배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후 19세기 초반 유성룡과 김성일 등의 문묘 종사 청원과 이상정(李象靖)의 서원 추향(追享) 문제 등으로 병파와 호파가 대립하였다.
병호시비의 연원은 1620년 여강서원(廬江書院)을 건립하면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배향하는데서 시작되었다. 여강서원은 퇴계 이황을 주향으로 하는 서원이므로, 퇴계 사후의 적전화(嫡傳化)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서원에 양인의 배향이 결정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거니와, 배향으로 결정된 후 가장 큰 난제가 양인의 위차 문제였다. 같은 배향이지만 동(東) · 서(西)에 대한 인식상의 차등이 있었고, 위차에 따라 양인의 지위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여강서원이 이황의 주향처라는 점에서 위차는 도학(道學)의 고하를 논하여야 하지만 이를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였기에 현실적으로 작위(爵位)와 나이가 그 기준으로 제시되었다. 유성룡 계열에서는 작위를 내세워,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을 동쪽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고, 김성일 계열에서는 나이를 내세워 4살 위인 김성일을 동쪽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논란 속에 당시 영남을 대표하던 정경세(鄭經世)의 자문을 받아 유성룡을 동쪽에, 김성일을 서쪽에 두는 ‘애동학서(厓東鶴西)’로 결정되어 일단락되었다. 김성일 계열에서는 불만이 있었으나, 당시 정경세의 위치 등을 감안하여 그대로 따르면서 논란이 일단락되었다.
여강서원은 1676년(숙종 2) 중앙 남인 세력의 지원을 받아 호계서원(虎溪書院)으로 바뀌어 사액을 받았다. 이런 과정에서 유성룡 계열은 풍산의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중심으로 활동한 반면, 김성일 계열은 호계서원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해갔다. 이런 이유로 유성룡 계열을 병파, 김성일 계열을 호파라 불렀다. 1796년(정조 20) 김성일과 유성룡 · 정구(鄭逑) · 장현광(張顯光)에 대한 문묘(文廟) 종사(從祀)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때 호파의 주도로 나이를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이 관철되었다. 이로부터 병파는 약 10여 년 동안 호계서원 출입을 하지 않았다. 1805년(순조 5) 이들에 대한 문묘 종사 운동이 다시 추진되는 과정에서 병파의 강력한 항의가 제기되면서 분란의 불씨가 제공되었다.
이후 1812년(순조 12) 호파에서 이상정(李象靖)을 호계서원에 추향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는 이상정의 추향을 통해서 호계서원이 이들의 거점이라는 사실을 표방하며 퇴계학파의 최대 계파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병파는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통문을 돌리는 등 반발하였다. 이에 관찰사가 나서서 이를 중재하려고 하였으나, 병파는 정치력을 동원하여 호파를 압박하였고, 호파는 혈연, 학연, 지연을 동원하여 대응하면서 양자의 사이를 벌려나갔다.
양측의 시비를 보합하려는 노력이 고종 초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고종 3) 유성룡의 8대손인 유후조(柳厚祚)를 정승으로 임면하고, 안동부사에게 시비의 진상을 파악해 해결방안을 모색하도록 하는 한편 보합을 위한 조정책을 거부하는 자를 적발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지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등 복잡한 정세로 인해 시행되지 않았다. 1870년(고종 7) 8월 흥선대원군은 다시 안동부사에게 보합에 대해 지시하였고, 8월 27일 호계서원에서 호파의 유림 600여 명, 병파의 유림 400여 명이 모여 논의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이 시비를 국가적 사건으로 간주해서 충역(忠逆)의 기준으로 논단할 수도 있다는 의향을 비치며 해결을 지시했다. 결국 삼계서원(三溪書院)에서 병산서원에 보합을 촉구하는 통문을 보내는 한편, 양측의 일부 인사들이 해결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보합적 분위기가 마련되면서 흥선대원군은 보합의 상징적인 조치로 병파와 호파의 주장을 담은 『여강지(廬江志)』와 『대산실기(大山實記)』의 목판과 판본을 불태우도록 지시했다. 같은 해 12월 14일 대구 감영에서 소각함으로써 상징적으로 논란이 종식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에 의해 호계서원이 훼철(毁撤)되면서 양측의 시비가 온존하는 가운데 2013년 5월 호계서원의 복원 사업을 계기로 경상북도에서 내놓은 중재안이 받아들여져 유성룡을 동쪽에, 김성일을 서쪽에 배향하며, 이상정을 서쪽에 배향하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병호시비는 퇴계 이황 사후 문인들 내부에서 퇴계 사후의 적전화 문제와 관련되어 출발하였다. 19세기 양측의 지지 세력이 병파와 호파와 나뉘어 대립한 일종의 향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