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4년(숙종 10)1735년(영조 11). 자는 여적(汝迪)이고, 호는 운산(雲山) · 운계(雲溪)이며 본관은 도강(道康)이다. 전라북도 태인(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출신이다. 조선 후기 숙종영조 연간에 활동했던 문신으로, 1728년(영조 4) 무신란 때 반란 세력 진압에 공을 세워 양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조선 개국원종공신인 충민공(忠敏公)김회련(金懷鍊)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김계종(金繼宗)이고, 조부는 김휘정(金輝挺)이며 아버지는 예조좌랑을 역임한 김만형(金萬衡)이다. 어머니는 배천 조씨 조석령(趙錫齡)의 딸이고, 부인은 무안 박씨 박창동(朴昌東)의 딸이다.
1711년(숙종 37)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1719년(숙종 45)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1720년(숙종 46) 2월 승정원 가주서를 거쳐 경종 연간에는 봉상시 봉사 등을 지냈다. 성균관 학유(學諭)와 성균관 학정(學正)을 겸하기도 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 5월 보안찰방에 제수되었다가 병환으로 개차되었고, 이후 양현고 직장,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의금부 도사, 병조좌랑 등을 거쳐 음죽 현감을 역임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 5월에 보덕(輔德) 윤성시(尹聖時) 등 소론 계열의 신료들이 1722년(경종 2) 목호룡(睦虎龍)이 고변에서 국왕을 어선(御膳)에 약을 타서 시해하려고 하는데 관련되었다고 언급한 김상궁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봉상시 봉사 김도언은 이때 연명으로 참여하였다. 김도언이 소론 계열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김도언은 의금부 도사로 재직하던 1728년(영조 4)에 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나자 4도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을 수행하여 전라도 나주 인근 섬에 숨어있는 반란군을 토벌하는데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경상도 합천에서 우방장(右防將) 이보혁(李普爀)과 함께 반란 세력의 핵심 인물인 조성좌(曺聖佐), 허택(許澤) 등과 교전하여 이들을 제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무신란 진압 이후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 공신호가 당초에는 奮武이었다가 1764년에 양무로 개정됨) 1등에 책록되었고, “강녕경복(康寧慶福) 만년무강(萬年無疆)” 8자의 어필과 금낭(錦囊), 금토수(錦吐手), 태평연도(太平宴圖) 등이 하사되었다. 태평연도는 무신란 진압 후 창덕궁 인정전에서 베풀어진 태평연을 그린 그림이다. 어필과 태평연도(太平宴圖), 공신 녹권을 비롯해 김도언의 생원시와 문과 교지, 부모추증교지, 어사화 등 유물이 1992년 6월 22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묘소는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옹동면 비봉리 선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