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4(인조 2)~1678(숙종 4). 자는 징보(徵甫)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서인계 유생인 그는 갑인예송(甲寅禮訟)으로 송시열(宋時烈)이 곤경에 처하게 되자 그를 변호하는 상소에 연명으로 참여하였다.
김두징(金斗徵)의 조부는 김홍필(金弘弼)이고, 아버지는 유학(幼學) 김자진(金自珍)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 이정방(李庭芳)의 딸인데 종친인 금산군(錦山君)이성윤(李誠胤)의 손녀이다. 한편 효종대 소현세자빈인 강빈(姜嬪)의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장살(杖殺)을 당한 김홍욱(金弘郁)은 종조부가 된다. 부인은 파평 윤씨 윤필은(尹弼殷)의 딸이다.
7살 때에 서숙(書塾)에 나아갔고, 13~14살 때 두루 경서를 읽었으며, 약관의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서는 여러 차례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과거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1673년(현종 14) 식년 생원과 3등에 입격하였는데, 이때 수석한 이진백(李震白) 등과 함께 국왕으로부터 종이 4권(卷)과 붓 4자루, 먹 3홀(笏)이 사급되었다. 1678년(숙종 4) 서울 집에서 거처하는 동안 풍질(風疾)로 인해 사망하였다.
1674년(현종 15) 이른바 제2차 예송인 갑인예송(甲寅禮訟)의 결과, 송시열 등에게 오례(誤禮)에 대한 책임이 주어지자 서인계 유생들이 송시열을 변명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때 연명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그는 향촌에 거주하면서 유생들과 계(稧)를 조직해서 곡물을 마련해 이를 자본으로 이식(利殖) 활동을 해서 그 이익으로 문방구를 조달하였다. 그런데 흉년이 들어 대출받은 사람이 이를 갚지 못하자, 김두징이 나서서 이를 갚아주고는 그 문권을 태워버렸다.
묘소는 현재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남정리에 위치해 있다. 묘비는 1995년 10월 7일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