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청 ()

조선시대사
제도
1894년(고종 31) 6월 내정 개혁을 위해 한시적으로 설치되었던 임시 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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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교정청은 1894년(고종 31) 6월 내정 개혁을 위해 한시적으로 설치되었던 임시 관청이다. 1894년 동학농민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이 체결된 후 농민군이 철수하자 수습을 위한 논의가 본격화되어 내정 개혁을 위한 교정청이 임시기구로 설치되었다. 교정청은 일본측에 군사 철수와 내정 개혁 간섭 중지를 요구하고,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입안한 12개 조항의 개혁내용을 공표하였다. 하지만 친일개화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본의 압력을 배제하며 내정을 추진하고자 했던 교정청은 폐지되고 그 역할은 군국기무처로 넘어갔다.

정의
1894년(고종 31) 6월 내정 개혁을 위해 한시적으로 설치되었던 임시 관청.
개설

교정청은 1894년(고종 31) 5월 동학 농민군이 철수한 뒤 6월 11일에 내정 개혁을 위해 임시로 설치되었다. 일본 측의 내정 개혁에 대한 압박을 배제하면서 6월 16일에는 12개 조항의 개혁 내용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6월 25일 친일개화파 주도의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내용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체결된 후 전주성을 점령했던 농민군이 철수하였다. 이후 정부에서는 시급 수습을 위한 논의가 본격화되었으며, 5월 12일 고종은 개혁과 관련한 대경장(大更張) 윤음을 발표하면서 김가진(金嘉鎭)을 내무 참의에 임명하는 등 후속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 와중에 농민군 진압을 목적으로 조선에 파병한 일본 측에서는 지속적인 군사 주둔의 목적을 위해 조선에 내정 개혁을 촉구하였으며, 특명전권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조선 측에 「내정개혁 방안강령(內政改革方案綱領)」을 제시하여 내무부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신정희(申正熙) 등을 위원으로 임명해 오토리 게이스케 등과 노인정(老人亭)에서 회담하는 한편,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6월 11일 국왕의 전교를 근거로 교정청을 설치하여 날마다 정치 개혁을 위한 방법을 논의하도록 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의 교정청 설치에 대해 오토리 게이스케는 개혁을 위장한 것으로 “청국 숭배자(淸國崇拜者)”의 권모술수라고 자국의 외무대신에게 보고하였다.

변천과 현황

교정청은 시 · 원임대신 6명을 총재관으로, 당상관 15명과 낭청 2명을 위원으로 차출하였고, 의정부 예하에 두어 모든 공문에는 의정부의 인신(印信)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총재관에는 신응조(申應朝) · 심순택(沈舜澤) · 김홍집(金弘集) · 김병시(金炳始) · 조병세(趙秉世) · 정범조(鄭範朝)가 차출되었고, 위원 중 당상관급으로는 김영수(金永壽) · 윤용구(尹用求) · 박정양(朴定陽) · 민영규(閔泳奎) · 신정희(申正熙) · 이유승(李裕承) · 김만식(金晩植) · 조종필(趙鍾弼) · 심상훈(沈相薰) · 김종한(金宗漢) · 조인승(曺寅承) · 김사철(金思轍) · 박용대(朴容大) · 이용직(李容稙) · 어윤중(魚允中)이, 낭청으로는 김각현(金珏鉉) · 정인표(鄭寅杓)가 차출되었다.

교정청 설치 직후인 6월 14일 조병직과 신정희 등은 일본 측에 군사의 철수와 함께 내정 개혁을 강제하는 것은 부당한 내정 간섭이라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이어 6월 16일에 교정청에서는 12개 조항의 개혁 내용을 공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① 향리가 유용한 환곡인 이포(吏逋)가 과다한 자에 대한 처벌, ② 공사채(公私債)의 인징(隣徵) 금지, ③ 지방관이 관내에서 구매하지 않은 토지를 점유하는 것에 대한 처벌, ④ 30년이 경과한 채송(債訟)의 심리 금지, ⑤ 각 읍 향리와 향원(鄕員)의 신중한 차출, ⑥ 세력을 가지고 타인의 토지를 탈취한 자에 대한 처벌, ⑦ 각 읍 관용 물품과 진배(進排) 물종을 시가에 따르며, 관지정(官支定 : 관청 수요 물품의 가격을 일정하게 지정함)은 혁파, ⑧ 부보상(負褓商) 외에 이름을 칭탁해 무리를 짓는 것의 금지, ⑨ 경각사(京各司) 별복정(別卜定)의 정부 보고와 사사로이 징수하는 것의 금지, ⑩ 가배(加排)와 호포(戶布) 이외 가렴(加斂)의 금지, ⑪ 구례(舊例)에 의거한 경우리 역가미(京郵吏役價米)의 시행, ⑫ 민고(民庫)의 혁파 등이다.

6월 21일 일본군이 궁궐을 장악한 뒤, 일본의 후원으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친일개화파를 중심으로 정권을 구성하였다. 이어 6월 25일에 군국기무처가 설치되면서 일본의 압력을 배제하며 내정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교정청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교정청이 시도한 개혁은 일본의 개혁 요구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추진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대부분의 개혁안이 이미 동학 농민군이 폐정개혁안으로 제시했던 내용이며, 기존 제도의 운영을 개선하는 데 그쳐 근본적인 개혁에는 한계가 있었다.

참고문헌

『고종시대사(高宗時代史)』
『일성록(日省錄)』
『속음청사(續陰晴史)』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1차 개혁」(유영익, 『신편 한국사』40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국사편찬위원회, 2000)
「집강소의 폐정개혁」(정창렬, 『신편 한국사』39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국사편찬위원회, 1999)
「통치기구의 재정비」(한철호, 『신편 한국사』39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국사편찬위원회, 1999)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 정부의 개혁추진과정」(김명섭, 『한국근현대사연구』3,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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