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렬왕 때부터 재용(財用) 또는 진자(賑資:화폐의 자원) 등 때문에 수시로 은(銀)·미곡(米穀)을 호 단위로 민간에 징렴(徵斂:거둬들임.)하였는데, 1302년(충렬왕 28)에는 성저(城底)의 민가에, 1328년(충숙왕 15)에는 개경 및 경기 8현의 민호(民戶)에게서 차등을 두어 저포(苧布)를 징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조 때 요역(徭役) 대신 양인호(良人戶:일반 평민)에게서 베를 징수하였는데, 그 액수는 대호 2필, 중호 1필, 소호 반필이었다. 1517년(중종 12) 함경도의 무격(巫覡:무당)들에게 호포를 징수하여 군자(軍資)로 사용하였고, 1601년(선조 34)에는 조사지대(詔使支待:칙사를 위한 접대)를 위하여 외방에 빈잔호(貧殘戶)를 제외하고 호포를 징수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군역(軍役)은 국방상의 이유보다도 국가재정의 보전책(補塡策)으로 성격이 변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5군영의 성립으로 모병제(募兵制)가 제도화되자, 양인장정의 대부분은 1년에 2필의 군포를 바치는 납포군화(納布軍化)하였는데, 정부는 재정압박의 타개책으로 군포총액을 미리 정해 놓고 이것을 고을 단위로 할당, 부과하였기 때문에 실제의 장정 수보다 훨씬 많은 군포를 연대적으로 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인징(隣徵)·백골징포(白骨徵布)·황구첨정(黃口簽丁) 등 양역의 폐단은 극심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시정하고 동시에 재정확충을 위한 방안으로 양반에 대한 징포문제가 때때로 제기되었다. 1654년(효종 5)에 영의정 김육(金堉)은 직역(職役)이 없는 양반자제에게 베 1필을 징수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숙종 즉위 초부터 양역변통(良役變通)의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위로는 공경(公卿)에서부터 아래로는 서천(庶賤)에 이르기까지 포를 내지 않는 호가 없도록 한다.”는 원칙 아래 계급을 떠난 호포의 징수로 군수(軍需)를 확충하고 양역을 감해 주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평생 공부하는 선비와 일자무식의 상사람이 다 같이 베를 바치는 것은 부당하다는 대다수 양반관료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시되지 못하였다.
1750년(영조 26)에는 균역법을 실시하여 종래 2필이던 양정(良丁)의 군포를 1필로 반감하고 그 부족분을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와 토지 1결당 결작(結作) 두 말을 받아 메웠는데, 이는 사실상 면역 대상자인 일부 양반들의 부담이었으며, 이로써 군역부담은 어느 정도 평준화되었던 것이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권하자 문란하였던 환곡(還穀)·전세(田稅)의 개혁과 함께 군정에도 일대 쇄신책을 단행하였다.
즉, 1871년(고종 8) 3월 종래의 군포를 호포로 개칭하고 균등과세의 원칙 아래 종래 양반들의 면세특전을 폐지, 신분계층의 상·하를 막론하고 호당 두 냥씩을 부과하였는데 양반들의 위신을 고려, 양반호에 대하여는 호주명(戶主名)이 아닌 하인의 노명(奴名)으로 납입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