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인 1687년(숙종 13) 복시(覆試)에 장원을 하였으나 양어머니와 친어머니의 상을 연이어 당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7년간 정성을 다하여 성묘(省墓)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칭송하였다.
그 후 당숙인 검암(儉庵) 손전(孫佺)의 권유로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1693년(숙종 19)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입격하였다. 1707년(숙종 33) 대책(對策)에서 장원을 하였다. 당시 그가 쓴 대책문은 선비들에게 부책(賦策)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1710년(숙종 36) 향시에서 장원을 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 학유(學諭)와 박사, 주부, 전적을 역임하고, 1714년(숙종 40) 삼례도 찰방(參禮道察訪)이 되었다.
당시 고을의 수령 중 세력 있는 자가 공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직접 상부 기관에 관문(關文)을 전달하려고 하였는데, 손명래가 관문을 전달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면서 깊이 꾸짖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몹시 화를 내면서 전라감사 이집(李㙫)에게 하소연하여 은밀히 해치려고 하였다. 하지만 관찰사는 오히려 수령을 꾸짖고 손명래의 강직함을 칭찬하였다.
찰방으로 재임하면서 역을 수리하고 역리(驛吏)가 예산을 도용하는 폐단을 바로잡아서 역민들이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 1717년(숙종 43)에 역리의 무함(誣陷)으로 체포된 적이 있었는데, 전 전라감사 이집의 변호로 풀려났고, 그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품성이 영달하여 9세에 산사(山寺)에서 독서를 하며 「사고(寺皷)」라는 시를 지었는데, 모든 사람이 그의 시를 칭찬하였다. 그가 쓴 대책은 한나라의 동중서(董仲舒)를, 사부(詞賦)는 양나라의 유신(庾信)을, 시문은 남송의 육유(陸游)를 닮았으며, 서기(序記)는 전국시대의 장주(莊周)의 열어구(列禦寇)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찍이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 청천(菁川) 신유한(申維翰) 등과 도의(道義)와 문장(文章)으로 사귀었다. 저술로는 『창사집(昌舍集)』 3권과 『비희록(悲喜錄)』 1책, 「일기(日記)」가 있다. 이외에도 대책(對策) 400여 편을 지었다.
사천현감(재임:1797~1798) 권사호(權思浩)가 행장(行狀)을 지었다. 1874년(고종 11)에는 이진상(李震相)이 행장을, 전라도관찰사 조성교(趙性敎)가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같은 해 5대손 손종만(孫鍾萬)과 손종갑(孫鍾甲)이 6권 3책의 『창사집』을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