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천장(天章), 호는 창설재(蒼雪齋).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5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권석충(權碩忠)이며, 아버지는 권유(權濡)이고,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이며, 처는 김시온(金是榲)의 딸이다.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이재(李栽) 등과 교유하였다.
1679년(숙종 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89년 문학으로 천거되고, 1694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태릉참봉(泰陵參奉)·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직장(直長)·종부시주부를 거쳐, 형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700년 봄 정랑(正郎)에 승진되었으나 곧 이어 영산현감(靈山縣監)으로 부임하여 풍속을 크게 교화시켰다.
1710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직강·전라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그 뒤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이변이 있자, 사직 상소를 올려 시정(時政)의 잘못에 대해서 논하였다. 1717년 영남에서 1만여 인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릴 때 그 상소문을 기초하였다.
1721년 경종이 즉위하자 고산찰방(高山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 귀향하였다. 1723년(경종 3)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 뒤 수찬이 되어 시정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문장이 뛰어났는데, 특히 시에 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산천의 형세, 인물의 출처(出處), 세대의 변혁, 동방군신(東方君臣)의 현부(賢否), 정치의 득실(得失) 등에도 예리한 안목이 있었다. 저서로는 『창설집(蒼雪集)』이 있고, 편서로는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과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