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필사본. 필사연대 미상. 1573년부터 1595년까지의 강론을 수록한 것이다. 이 글은 1906년에 중간되었던 『동강선생문집(東岡先生文集)』과 1976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 발간한 『동강전집』의 권11에서 권14까지에 수록되어 전해진다.
강의는 주로 비현각(丕顯閣)·사정전(思政殿) 등에서 행해졌으며, 당시 경연에는 이이(李珥)·유성룡(柳成龍)·노수신(盧守愼) 등이 참석하기도 하였다. 김우옹(金宇顒)은 조식(曺植)과 이황(李滉)의 문인으로서 성리학과 시문에 뛰어났으며, 경연에서 강론할 때는 공정한 입장에서 간명하고 명석하게 요점을 지적하여 분석함으로써, 당시 최고의 강관으로 추대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것은 저자가 34세 때 홍문관정자로서 경연관이 되면서부터 대사헌에 이를 때까지 총 43회에 걸쳐서 강론한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1573년에서 1577년까지 총 21회에 걸쳐 『서경』을 강의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내용은 『서경』의 「탕서(湯誓)」·「태갑(太甲)」에서 「소고(召誥)」·「군아(君牙)」편까지인데, 제왕의 치도와 경계에 대한 것이다. 천하의 질서와 어지러움은 군왕의 한 몸에 달려 있으므로, 제왕의 학문을 닦고 정심(正心)으로써 의리를 분별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성찰(省察)과 극기로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군왕은 하늘이 백성을 위하여 세운 것임을 명심하여,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위민정치(爲民政治)를 실시하도록 진언하였다.
그는 1579년과 1581년에는 총 11회에 걸쳐서 『춘추』를, 1585년에는 3회에 걸쳐서 『강목』을, 또한 1594년에 1회와 1595년에 2회는 『주역』을 강론하였다. 당시 임진왜란으로 인한 백성의 참상을 계품(啓禀)하여, 어진 선비를 발탁하여 정사를 맡기고 기강을 확립할 것을 논하였다. 매번 강론에 임하여 선조에게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아뢰었고,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분별을 주장했으며, 특히 경과 의를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