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은 13인이다. 성균관은 고려 성종 때 설치한 국자감(國子監)이 뒤에 국학으로 바뀌었다가 1308년(충렬왕 34) 6월에 비로소 성균관으로 개정하였으며, 그 뒤에도 여러 번 개변이 있었으나 전적의 관직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태조신반관제에서는 종5품의 전부(典簿) 1인을 두었으며, 1401년(태종 1) 7월에 주부로 고쳐 정6품으로 내렸는데, 이것이 1466년(세조 12) 정월의 관제개혁 때 전적으로 바뀌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언제 정원이 1인에서 13인으로 증원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469년(예종 1) 5월의 기록에 성균관 참외(參外)에 20인이 있어 사학훈도(四學訓導)를 겸차(兼差)한 사실이 보이는데,『경국대전』에 참외는 박사를 비롯하여 모두 12인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물론 전적은 참상(參上)이기는 하지만 이런 데에서 전적이 13인으로 대폭 증원되는 한 가닥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편, 1469년 7월의 기록에 종학(宗學)의 전훈(典訓) 이하를 사예·직강·전적이 겸한다 하고, 또 『경국대전』에 양현고(養賢庫)의 주부를 전적이 겸하고 사학조(四學條)에 사학의 교관을 전적 이하가 겸하고 있는 것 등으로 보아 겸직이 많아 그렇게 증원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