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망은 조선 후기 『가례기의(家禮記疑)』를 저술한 학자로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인으로 예학(禮學)에 밝아서 예가(禮家)의 종장(宗匠)으로 불렸다. 향리에서 문인을 양성하며 예법(禮法)을 가르쳐 풍속을 순화하였다. 관찰사가 행의(行義)로서 천거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형(子衡). 부원군(府院君) 김국광(金國光)의 후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김세칭(金世稱), 증조할아버지는 통정대부 김정수(金廷秀)이다. 할아버지는 참봉(參奉) 김길추(金吉秋), 아버지 김상원(金尙元)이다. 어머니는 만호(萬戶) 임대원(任大源)의 딸 서하임씨(西河任氏)이다. 부인은 통정대부 김의충(金義忠)의 딸 영광김씨(靈光金氏)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김홍제(金弘濟) · 김홍필(金弘弼) · 김홍대(金弘大)이다.
김신망은 황해도 은율(殷栗)[옛 지명은 장련(長連)]에 우거(寓居)하며 직접 농사일을 하면서 부모를 모셨는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천성이 성실하고 지조가 확고하여 사람을 가르치면 반드시 성신(誠信)을 다하였다.
일찍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사례(四禮)를 배우고 물러가서 생도에게 교수하였는데, 그의 초상(初喪)에 1백여 명의 문인이 모일 정도였다. 또한 예학에 밝아서 사람들이 예가의 종장으로 칭송하였다. 송시열은 김신망에게 ‘경회당(景晦堂)’이라는 당액(堂額)을 직접 써 주어 주자(朱子)와 같은 현인(賢人)을 지향하도록 당부하였다.
실제 김신망은 주자의 정칙(定則)에 따라 관혼상제(冠婚喪祭)를 행하였으며, 송시열이 사망하자 3년 동안 심상(心喪)을 지내고 기일(忌日)에는 분향(焚香)과 망곡(望哭)을 행하였다. 이 외에도 시사(時事)에도 관심을 두고서 일찍이 도(道)의 폐단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환(仕宦)에는 뜻이 없었기에 관찰사(觀察使) 맹만택(孟萬澤)이 일곱 고을의 서장(書狀)에 따라 그의 행의(行義)를 조정에 천거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어려서 가학(家學)으로 『효경(孝經)』과 『소학(小學)』 등의 글을 통달하였고, 그 후 같은 고을의 첩암(疊巖) 이열(李悅)에게 나아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웠다. 20세를 전후하여 송시열의 문하에서 경전과 성리서를 익히고,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에게 나아가 다시 『소학』에서부터 경서(經書)와 제자(諸子)의 설까지 일일이 배우며 오의(奧義)를 질의하여 익혔다.
1666년(현종 7) 송시열과 지내며 예학(禮學)을 질의하고, 1675년(숙종 1)에도 송시열의 유배지에서 함께 지내며 주자서(朱子書)를 강독하였다. 오랫동안 예서(禮書)를 공부하며 물어서 판별한 것을 그때그때 기록하여 『가례기의』를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