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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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동문선 중 광릉부원군이극배행장
속동문선 중 광릉부원군이극배행장
한문학
개념
사관들의 역사 편찬이나 고인의 명문 · 전기 등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고인의 세계 · 성명 · 자호 · 관향 · 관작 · 생졸연월 · 자손록 및 평생의 언행 등을 서술하는 한문문체.
내용 요약

행장은 사관들의 역사 편찬이나 고인의 명문·전기 등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고인의 세계, 성명, 자호, 관향, 관작, 생졸연월, 자손록 및 평생의 언행 등을 서술하는 한문 문체이다. 행장이란 죽은 사람의 행실을 간명하게 쓰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이에 행장은 전기(傳記)보다는 잡다한 이론을 피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중국에서 행장은 육조(六朝) 때에 와서야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의 행장의 역사는 『속동문선』에 처음 보인다. 행장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장황하고 번다하게 많이 쓰는 것이 좋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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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관들의 역사 편찬이나 고인의 명문 · 전기 등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고인의 세계 · 성명 · 자호 · 관향 · 관작 · 생졸연월 · 자손록 및 평생의 언행 등을 서술하는 한문문체.
내용

장(狀)은 모양이라는 뜻으로 행동거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행장이란 죽은 사람의 행실을 간명하게 써서 보는 이로 하여금 죽은 사람을 직접 보는 것처럼 살펴볼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사명이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행장은 전기(傳記)보다는 잡다한 이론을 피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 하겠다. 행장의 기원은 『문장연기(文章緣起)』에 의하면 한대(漢代) 호간(胡幹)이 양원백(揚元伯)의 행장을 지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아 그 체형이 어떠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밖의 행장도 한대에 유행되었다 하나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행장은 육조(六朝) 때에 와서야 일반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 나라에서의 행장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아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처음 보이기 시작한다. 조선 초기 홍귀달(洪貴達)의 「광릉부원군 이극배 행장(廣陵府院君李克培行狀)」, 신종호(申從濩)의 「충정공 허종 행장(忠貞公許琮行狀)」, 박은(朴誾)의 「망실고령신씨 행장(亡室高靈申氏行狀)」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도 물론 체형이 간결하고 번다한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행장의 본래 체재를 어느 정도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행장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양상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행장은 장황하고 번다하게 많이 쓰는 것이 좋은 것으로 인식되어 주1의 시말(始末), 사건의 배경, 그 의론(議論)과 행동거지의 철학적 근거, 주2을 배격해야 하는 이유, 심지어는 주3에 대한 내용과 그 의리의 타당성까지 세미하게 적어 그 양이 1권의 책자가 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단하(李端夏)가 그 아버지 이식(李植)의 행장을 쓰는 데에 장장 100장이 넘었다. 김창협(金昌協)이 그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의 행장을 쓰는 데에 상하 2책이 되는 등의 주4의 방대한 행장의 체가 나오게 되었다. 그밖에도 조익(趙翼)의 「이정구행장(李廷龜行狀)」, 김장생(金長生)의 「이이행장(李珥行狀)」, 송시열(宋時烈)의 「조헌행장(趙憲行狀)」 등 그 분량이 자못 방대하다.

행장의 방대한 형태가 배태된 것은 송대(宋代) 황간(黃幹)이 스승 주자(朱子)의 행장을 쓰면서 장장 40여 장을 쓴 데서 연유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길게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편말에 붙이고 있다. 그 이유를 요약하면 주자의 거취는 바로 세도(世道)의 흥망과 직결되며 후학의 준거틀이므로 일반적인 행장의 체와는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행장을 길게 쓰게 된 것은 바로 황간의 체를 배운 것으로 황간보다도 오히려 갑절이 되게 썼으니 ‘청출어람청어람(靑出於藍靑於藍)’이라 하겠다. 여기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 문인이나 자제들은 유사(遺事) 또는 주5라는 이름을 붙여 자신들이 기억에서 누락되었다고 여기는 부분을 추가하여 서술하였다. 이 글 역시 호호창창하다. 결국 자기의 스승이나 자기의 선대를 성인의 경지에 올려놓고야 말겠다는 심산이 엿보인다.

행장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다. 허목(許穆)은 “행장이란 그 행적을 쓰는 것이다. 나를 주공(周公) · 공자(孔子)라 하여도 나는 주공 · 공자가 아니며, 나를 정자(程子) · 주자라 하여도 나는 정자 · 주자가 아니다. 살았을 때에 주공 · 공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죽어 지하에서 주공 · 공자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당시의 사조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언급할 것은 그의 말은 그 당시 사조가 대부분 그러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행장체가 모두 그러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 또는 학파에 따라 전통을 고집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월사집(月沙集)』
『외재집(畏齋集)』
『농암집(農巖集)』
『송자대전(宋子大全)』
『주자대전(朱子大全)』
『문체명변(文體明辨)』
주석
주1

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 또는 그 글. 주로 간관(諫官)이나 삼관(三館)의 관원이 임금에게 정사(政事)를 간하기 위하여 올렸다. 우리말샘

주2

자기가 믿는 이외의 도(道). 우리말샘

주3

조선 시대에,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던 일. 또는 그 진술. 우리말샘

주4

전에 들어 보지 못함. 우리말샘

주5

기록에 빠지거나 알려지지 아니하여 세상에 드러나지 아니한 사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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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도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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