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의 본관은 고령(高嶺)이고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다. 아버지는 한성부판관 박담손(朴聃孫)이며, 어머니는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 이이(李苡)의 딸이다.
박은은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았으며, 정신과 골격이 맑고 눈썹과 눈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속세에 사는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4세에 독서할 줄 알았고 8세에 대의를 알았으며 김종직(金宗直)과 최부(崔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93년(성종 24) 15세에 이르러서는 문장에 능통하였으며, 당시 대제학이었던 신용개(申用漑)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
박은은 1495년(연산군 1) 17세로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었다. 같은 해 사가독서자(賜暇讀書者)로 선발되어 신용개(申用漑), 김일손(金馹孫), 남곤(南袞) 등 14인과 함께 용산(龍山) 독서당(讀書堂)에서 공부하였다. 승문원 권지(承文院權知)를 받고 홍문관에 선택되어 정자가 되고, 수찬에 있으면서 5년 동안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다.
1498년(연산군 4) 20세의 나이로 유자광(柳子光)의 간사함과 성준(成俊)이 유자광에게 아첨함을 고발하는 소(疏)를 올렸으나 오히려 그들의 모함을 받았다. 평소 직언을 꺼린 연산군은 "사사부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박은을 파직시켰다. 박은은 1501년(연산군 7) 23세에 파직되어 옥에 갇혔다.
파직으로 인해 경제적 ·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하게 되자, 이때부터 스스로 세속 사람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자연에 묻혀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세월을 보냈다. 1503년(연산군 9)에 어려운 가정을 힘겹게 꾸려나간 아내 신씨가 2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에 다시 지제교(知製敎)로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박은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에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었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6월 15일 “거짓 충성으로 스스로의 편안함을 구하고 신진으로서 장관을 업신여겼다[詐忠自安 新進侮長官].”라는 죄목으로 효수(梟首)되니, 그의 나이 26세였다. 죽은 뒤 3년 후 1507년(중종 2) 신원이 되고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박은의 시는 주로 자신이 파직된 이후부터 아내가 죽기 전까지 지어진 것이다. 그는 시를 통해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온갖 고뇌로부터 정신적으로 평화로워지고자 하였다. 그의 시에는 현실 초극을 위한 노력과 주변 인물의 죽음을 통한 인생무상이 담겨 있다.
박은은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대표적 시인이다. 그는 천재적인 시인으로 짧은 생애에 비해 적지 않은 시작품을 남겼으며 후대의 대가들로부터 우리나라 제일의 시인으로 추대된다. 그는 김창협, 김만중, 김춘택으로부터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시는 강서시풍(江西詩風) 특히 황산곡(黃山谷)과 진사도(陳師道)의 시풍을 수용하면서 송시적(宋詩的) 특질을 지니며 아울러 당시적(唐詩的) 특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경사편」 5 「논사류」 2에 보면, 「동국(東國) 제일의 인재(人材)에 대한 변증설」이 있다. 그 글에서 이규경(李圭景)은 박은의 시를 동국 제일로 꼽았다.
허균(許筠)은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박은을 김계온(金季昷) · 김시습(金時習) · 이행(李荇) · 김정(金淨) · 정사룡(鄭士龍) ·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언급하면서, 이들을 명나라 복고파인 전후칠자(前後七子)와 비교하였다.
홍대용(洪大容) 역시 『항전척독(杭傳尺牘)』의 「추루에게 준 편지〔與秋書〕」에서, 박은과 노수신(盧守愼)을 '동방의 이백 · 두보'라 일컬었다.
정조는 박은의 시가 정경이 융합되어 당시와 송시의 경지를 뛰어넘어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그를 ‘조선조에서 제일가는 시인’으로 추앙하였다. 그의 유고집인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에 어제 서문을 써 주었으며, 그 책을 간행하여 반포토록 명하였다. 이에 박은의 절친한 친구인 이행(李荇)이 그의 시를 모아 『읍취헌유고』 1책을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