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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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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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홍문관 · 승문원 · 교서관(뒤에 규장각에 소속)의 정9품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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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홍문관 · 승문원 · 교서관(뒤에 규장각에 소속)의 정9품 관직.
내용

정원은 2인이다. 홍문관은 1420년(세종 2) 3월에 설치된 집현전(集賢殿)의 후신이다.

집현전에도 정9품 2인의 정자가 설치되어 녹관(祿官)으로서 경연관(經筵官)을 겸했는데, 문신으로 재행이 있는 젊은 사람을 뽑았다. 집현전이 경연을 전담해 차차 언론의 기능을 가짐에 따라 정자도 대간의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1456년(세조 2) 6월에 사육신사건이 일어나자 집현전 학사출신들이 많이 연루되어 혁파되고, 집현전의 장서각(藏書閣)을 예문관에 옮겨 겸예문을 두어 관리하였다. 그러나 집현전의 직무를 아주 없앨 수는 없어 1463년 11월 장서각을 홍문관으로 개편하였다.

이 때 전임관은 없고 모두 겸임관이었는데, 여기에도 정자 2인을 설치한 기록이 보인다. 실무적인 정자 등은 예문관에서 겸하는 이른바 겸예문이었기 때문에 이 당시의 홍문관은 예문관에 예속되어 있었다.

1470년(성종 1) 4월 구 집현전관제 중 부제학 이하 부수찬 15인을 예문관에 다시 설치해 그 기구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경연과 춘추관의 직무를 겸하게 함으로써, 예문관은 종래의 예문관직제와 구 집현전직제의 복합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정언은 겸예문으로서 그대로 장서의 일을 맡고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예문관을 대폭 강화한 것은 예문관으로 하여금 구 집현전제도를 대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두 기관의 복합체 운영은 곧 여러 가지 모순이 드러나 1478년 3월 다시 구 집현전직제에 따라 예문관에 정자 2인 등 참하관(參下官) 4인을 증설해 1일3강제(一日三講制)에 따라 경연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분관의 논의를 유발시켜 드디어 예문관과 홍문관은 완전히 분리, 독립하게 되었다.

승문원의 정자는 1411년(태종 11)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를 승문원으로 개편하면서 2인을 둔 뒤 1466년(세조 12) 『경국대전』에 그대로 직제화하였다. 주로 외교문서의 검토·교정을 담당하였다.

한편 교서관의 정자는 1466년 전교서(典校暑)로 개칭하면서 종전의 교감(校勘)이 개칭된 것이다. 이들은 주로 관찬의 서적 교정과 각종 제향의 축문을 필사·검토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1782년(정조 6) 교서관이 규장각 외각으로 통합되면서 정자도 이에 속하게 되었다.

정자 등 홍문관의 참하관은 청직(淸職) 중에서도 으뜸가는 관직이어서 다른 관원의 선임과 별도로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을 통해 선발하였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집필자
김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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