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협은 조선 후기 병조참지, 예조참의,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중화, 호는 농암, 삼주이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51년(효종 2)에 출생하여 1708년(숙종 34)에 사망했다.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칠정이 이와 기를 겸했더라도 그 선함은 기가 능히 이를 따름이요, 그 선하지 않음은 기가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처음부터 기가 주된 것이다.”라며 이이의 기발이승설을 지지하였다.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하며, 시는 고상하다는 평을 받았다. 저서로는 『농암집』 등이 있다. 양주의 석실서원에 제향되었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에 출사하였다. 이어서 병조좌랑 · 사헌부지평 · 부교리 등을 거쳐 교리 · 이조좌랑 · 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 · 이조정랑 · 집의 · 동부승지 · 대사성 · 병조참지(兵曹參知) · 예조참의 ·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명에 의해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였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 · 예조참판 · 홍문관제학 · 이조참판 · 대제학 · 예조판서 · 세자우부빈객 · 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김창협은 학문적으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사단(四端)은 선(善)뿐이고 칠정(七情)은 선과 악을 겸했으니, 사단은 오로지 이(理)만 뜻하고 칠정은 기(氣)를 겸한 것이다.”라는 이이의 설에 대해, 다만 기까지 겸하였다는 한 구절에서 차이를 보인다. “칠정이 비록 이와 기를 겸했더라도 그 선한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랐음이요, 그 선하지 않은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처음부터 기가 주된 것이다.”라고 하여 이이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지지하였다.
김창협은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도 “기의 맑은 것은 모두 선하지만 선한 정(情)이 모두 맑은 기에서 나왔다 함은 옳지 않으며, 정의 악한 것이 탁(濁)한 기에서 나왔지만 탁한 기가 발(發)해 된 정이 모두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또한 김창협은 “인심의 동(動)함에 이가 비록 기에 탔어도 기가 또한 이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만약, 선악의 정을 모두 기의 청탁에 돌린다면 이의 실체와 성(性)의 선함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악론변(性惡論辨)」에서 김창협은 “사람의 성은 본래 선한 것이나 순경(荀卿)이 인성을 악하다고 말한 것은 기요, 성이 아니다. 대체로, 사람이 세상에 날 때 기는 질(質)이 되고 이는 성이 되는 것인데, 이에는 선만 있고 악이 없으나 기에는 선한 것도 있고 선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 사람에게 선하지 못함이 있음은 기의 소위이다.”라고 규정하였다.
김창협의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하여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었으며, 김창협의 시는 두보(杜甫)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상한 시풍을 이루었다. 특히,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써서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 · 「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 · 「김숭겸표(金崇謙表)」 · 「김명원신도비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저서로는 『농암집(農巖集)』 ·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 『논어상설(論語詳說)』 · 『오자수언(五子粹言)』 · 『이가시선(二家詩選)』 등이 있고, 편저로는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 · 『문곡연보(文谷年譜)』 등이 있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