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이란 매우 오묘해서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마음에 대한 관심은 오랜 것으로 보이며, 인심도심설의 문제도 그 중의 하나이다.
중국 철학사에서 인심도심설에 대한 문제가 처음 나타난 것은 기록상으로는 요순시대라고 본다. 이는 중국의 고전인 ≪서경≫의 기록에 근거를 둔 것이다.
≪서경≫의 대우모편(大禹謨篇)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희미하니, 오직 정(精)하고 일(一)하여야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리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이 말은 중국 고대의 순(舜) 임금이 자신의 임금자리를 우(禹)에게 넘겨주면서 마음을 조심하고 살피라는 뜻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열여섯 글자의 한자어에 담긴 뜻이 매우 함축적이어서 보다 상세한 해석이 필요하게 되었다.
후대에 ≪논어≫나 ≪순자≫와 같은 책 인심도심과 관련된 구절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해석은 만족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2세기 송나라의 주희(朱熹)에 이르러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사서(四書) 중의 하나인 ≪중용≫의 머릿글에서 인심도심의 문제에 의의를 부여하고, 철학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 일부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은 하나뿐이다. 하지만, 인심과 도심에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은 마음이 혹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私]에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성명(性命)의 올바름[正]에서 근원하기도 해, 그 지각함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심은 위태해서 불안하고, 도심은 미묘해서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사람이면 누구나 형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심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심도심이 한 마음 속에 섞여 있음에도 그것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위태로운 인심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미묘한 도심은 더욱 미묘해져서 천리(天理)의 공(公)이 마침내 인욕(人欲)의 사(私)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정(精)하면 인심과 도심의 사이를 살펴서 섞이지 않는 것이요, 일(一)하면 그 본심의 올바름을 지켜서 이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주자의 글에 의하면, 인심이란 대체로 인간의 신체적 기운에서 나타나는 것이요, 도심이란 선천적인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볼 때 순수하게 도덕적인 것은 도심이요, 그 자체로서 부도덕한 것은 아니지만, 신체적인 기운에 따라서 부도덕으로 흐를 위험성이 높은 것은 인심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원래는 한 마음이지만, 그것이 작용할 때 의리를 따라서 나타나면 도심이요, 신체상의 어떤 욕구를 따라서 나타나면 인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심에 대해서는 선하다고 말할 수 있고, 인심에 대해서는 선한 경우와 악한 경우가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도심이란 곧 도덕적인 마음이다. 이것이 순수하게 착한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타고날 때부터 착하다고 보는 것(性善說)에 근거를 둔다.
그리하여 도심은 인간에게 있는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그리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마음은 일단 인간의 감각적인 욕구가 배제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양심에 따라서 행동한다면, 이것이 곧 도심이 나타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심은 성질상 매우 미묘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깊은 곳을 잘 살피지 않으면 도심을 깨달을 수 없고, 그러한 점에서 욕심에 흐르기 쉽다.
도심은 도덕적인 마음이지만, 사람은 욕심이 발동하기가 쉽기 때문에 “도심은 희미하다(道心惟微).”고 ≪서경≫에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도심에 비해 인심이란 그 자체를 부도덕한 마음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항상 부도덕으로 흘러 갈 위험성이 있는 마음이다. 즉, 인심의 성질은 위태로운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감각적인 욕구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며, 그 만큼 맹목적이기 쉽기 때문이다.
배가 고플 때 먹고 싶은 것이나, 추울 때 따뜻하게 입고 싶은 것, 정기가 왕성해 이성(異性)을 생각하는 일 등은 도덕이 아주 높은 사람도 거절하기가 힘들다.
일상 생활에서 이러한 마음은 아주 자주 일어나며, 그 만큼 그 정도를 초과할 위험성이 높다. 주희의 표현대로 인심은 위태해서 불안한 것이다. 바로 ≪서경≫에서 “인심은 위태하다(人心惟危).”고 표현한 까닭이다.
문제는 인심을 인욕 자체로 볼 수 있느냐에 있다. 인욕이란 부도덕한 측면이 매우 강한 경우를 말한다. 만일, 인욕이 부도덕성 그 자체라면, 인심이 발동해 인욕에 흐르면 악한 경우가 된다. 그리고 인심은 나쁜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배가 고플 때 음식을 찾고, 정기가 왕성할 때 이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서는 나쁜 마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심 자체는 선악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고 봄이 옳다.
인심과 도심의 이와 같은 성격 때문에, 주자는 사람으로서 취할 수 있는 정일(精一)의 자세를 강조한다. 즉, 도심은 미묘하지만 이것을 잘 살펴서 키워 나가도록 권장되며, 인심은 위태로운 것이지만 역시 잘 살펴서 조화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정밀히 하고 한결같이 한다(精一)는 것은 수양의 방법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하면 능히 그 중용(中庸)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니, 이 상태가 인간 행위의 바람직한 경우다. ≪서경≫에서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라(允執厥中).”라고 말한 까닭도 이것이다.
그리하여 주희도 “반드시 도심으로 하여금 한 몸의 주장이 되고 인심이 언제나 명령을 듣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심도심설의 문제는 한국 철학에서도 매우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다. 이황은 그의 사상 전개에 있어서 도덕의 영역을 매우 귀중한 것으로 여겼고, 생전의 삶의 모습도 그 만큼 인심도심설이 가지는 철학적 의미를 매우 높게 설정하였다.
그는 인심이 인욕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은 점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주희의 학설을 많이 인용하면서 인심과 도심의 문제를 전개한다. 그에게 있어서 인심도심설의 문제는 단순히 윤리 혹은 심리 현상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황은 “인심은 칠정(七情)이 되고, 도심은 사단(四端)이 된다.”고 말함으로써, 인심도심설의 문제를 이른바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의 문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그리고 인심을 인욕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서, 인심을 나쁜 측면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이황은 도덕 수양의 학문을 요약,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한다(遏人欲存天理).”라고 했는데, 이 경우에 ‘인심 일변(一邊)에 속하는 인욕을 막고, 도심 일변에 속하는 천리를 보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된다. 이황의 학문 체계에서 인심도심설이 지니는 의미는 이토록 매우 크다.
이이는 47세 되던 1582년에 <인심도심도설>이라는 글과 그림을 그려 임금에게 올리면서 인심도심설의 문제를 정리하고 있다. 이 글은 매우 논리적이며 명석하게 인심과 도심의 초점을 지적하고 있다.
먼저 그는 심(心)·성(性)·정(情)의 관계를 요약해 “마음이 성·정을 통섭한다(心統性情).”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의 정이 발동할 때 도의를 위해서 나타나는 것이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며,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며, 어린애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측은하게 여기며, 의로운 것이 아님을 볼 때 부끄럽게 여기며, 종묘를 지날 때 공경하는 것 등이니, 이것을 도심이라 한다.”
“또, 정이 발동할 때 몸을 위해 나타나는 것이 있다. 배고플 때 먹으려 하며, 추울 때 입으려 하며, 힘들 때 쉬고자 하며, 정기가 성하면 이성을 생각하는 것 등이 이것이니, 이것을 인심이라 한다.”
이상에서 본다면 인심과 도심이란 사람의 심리 작용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마음의 본체는 성(性)인데 이 경우는 마음이 아직 발동하지 아니한 것(未發)이요, 그 마음의 작용이 정이 되어 발동하는 경우(已發)에 이른바 인심 또는 도심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서양 철학의 개념을 빌려서 생각하면, 아직 발동하지 않은 상태로의 마음의 본체[性]는 잠재적인 가능태(potentiality)로 있는 것이요, 발동의 상태로 전환한 마음의 작용[情]은 현실태(entelechy)로서 이것이 인심과 도심으로 불린다는 뜻이다.
이이는 또한 인심도심의 문제를 선악의 문제와 연결시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도심은 순수한 천리인 까닭에 착한 것만 있고 나쁜 것은 없다. 인심은 천리도 있고 인욕도 있는 까닭에 착한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마땅히 먹을 때 먹고 입을 때 입어야 하는 것은 성현도 면할 수 없는 바이니, 이는 곧 천리요, 음식과 성욕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악한 곳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인욕이다.”
이 말은 인심도심과 선악의 관계를 밝힌 것으로, 도심은 오로지 선이요, 인심은 선과 악이 모두 있다는 것이다. 인심과 도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윤리적 수양면에서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 즉,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 의지(free will)를 인정하고 있는 점이다. 실제로 이이는 사람의 기질이란 고칠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의 도덕성은 함양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황과 달리 이이는 사단이 도심인 것은 가능하지만,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이이의 철학 체계에서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고 있다는 논리적인 구조에서 유래한다.
나아가 이이는 인심과 도심은 서로 시작과 끝의 관계가 있다는 이른바 ‘인심도심종시설(人心道心終始說)’을 주장한다.
인심과 도심은 서로 쌍립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인심이던 것이 나중에 도심이 되고, 처음에 도심이던 것이 나중에 인심이 된다는 설로서, 인심과 도심의 상호 작용을 밝혀 주는 의미가 있다. 인심도심종시설은 다른 유학자들에게서는 찾기 어려운 독특한 주장이라 하겠다.
사람의 마음이란 본래 비어 있는(虛靈)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바깥세계와의 접촉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바, 그때의 지각(知覺)이 육체적 감각을 따라가면 인심이고, 의리를 따라가면 도심이 된다.
현대적인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인심은 감성적인 것이요 도심은 이성적인 것이다. 이 감성적인 욕구를 옛 사람들은 인욕이라고 불렀고, 이성적인 도의를 천리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욕구(인욕) 자체를 악한 것으로 생각했던 학자들은 이를 가능한 한 억제해 현실 생활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윤리적 이상으로 여겼다. 따라서 인욕을 최대한 억제하려는 방향으로 이론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인 인간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이이는 인심의 유선유악(有善有惡)의 두 측면을 인식하면서, 선한 측면은 부도덕한 것으로 여길 필요가 없으며, 주로 악한 측면을 잘 살피고 조절해 통섭(通涉)할 것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