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집』은 조선 후기 문신 농암 김창협의 시문집이다. 총 42권 15책으로 활자본 및 목판본 등이 다수 전해진다. 이 책에는 사상가와 학자로서의 김창협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물론이고, 문인으로서의 김창협을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문학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조선 후기 철학사 ‧ 문학사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당대의 정치나 정세와 관련한 자료들도 여럿 보이므로 정치사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책의 원집은 여러 차례 증보(增補) 및 간행(刊行)되었다. 초간본(初刊本) 원집 34권은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1651~1708)이 사망한 다음 해인 1709년(숙종 35)에 문인 김시좌(金時佐) ‧ 어유봉(魚有鳳) 등이 주도하여 활자(活字)로 간행한 것이고, 중간본(重刊本)은 1710년(숙종 36)에 아우 김창흡(金昌翕) 등이 주도하여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고, 삼간본(三刊本)은 1928년에 후손 김영한(金甯漢) ‧ 서상춘(徐相春) 등이 주도하여 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원집 36권(부록 2권 포함), 속집 2권, 별집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집의 부록 2권은 1754년(영조 30)에 손자 김원행(金元行)이 편찬(編纂)하였다. 이것을 안동부사 조돈(趙暾)이 원집과 합치고 보충하여 간행했다[補刻]. 이 보각본(補刻本)은 36권 18책의 목판본이다. 원집의 김창흡의 서(序)와 김원행의 발(跋)이 있다.
속집 2권에는 원집에 편입되지 않은 「선부군행장(先府君行狀)」 및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등 김수근(金洙根)이 모으고 정리한 중요한 글들이 실려 있다. 1854년(철종 5)에 금속활자(金屬活字)로 간행하였다. 속집은 원집과 합쳐서 편집한 것으로, 김수근의 속집발(續集跋)이 추가되었다.
별집 4권은 김영한이 서상춘과 힘을 모아 원집과 속집에서 빠진 그 밖의 유문(遺文)을 모은 것이다. 42권 15책으로 원집과 함께 1928년에 간행하였는데, 김영한의 중간발(重刊跋)을 덧붙였다.
원집 권1∼6에는 부(賦) 4수, 시 890여 수, 권7∼9에는 소(疏) · 차(箚) 60여 편, 권10에는 계(啓) 1편, 의(議) 1편, 강의 2편, 권11∼20에는 서(書) 275편, 권21 · 22에는 서(序) 38편, 권23 · 24에는 기(記) 22편, 권25에는 제(題) · 발 16편, 교서(敎書) 2편, 전장(箋狀) 2편, 상량문(上樑文) 2편, 찬(讚) · 명(銘) 4편, 축사(祝辭) 1편, 혼서(昏書) 1편, 권26에는 잡저(雜著) 1편, 권27에는 묘지명(墓誌銘) 18편, 권28에는 신도비명 1편, 묘갈명(墓碣銘) 2편, 묘표(墓表) 6편, 행장(行狀) 2편, 권29 · 30에는 제문(祭文) 12편, 애사(哀詞) 6편, 권31∼34에는 잡지(雜識)가 실려 있다.
속집 권1 · 2에는 행장 · 서(書) · 묘지(墓誌) · 설(說)이 각각 1편씩 실려 있다. 별집 권1에는 시 2수, 서(書) 9편, 그리고 서(序) · 제문 · 행록(行錄) · 시책(試策)이 각각 1편씩 있다. 권2∼4에는 부록으로 사제문 · 제문 · 어록(語錄)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논퇴율양선생사단칠정설(論退栗兩先生四端七情說)」에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가 아직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다. 즉 단(端)과 정(情)이 다 같이 성(性)의 발동인 이상, 이(理)와 기(氣)가 함께 발한다[共發]고 본 이이의 뜻에 찬성하고 따르지만, 사단(四端)은 이(理)를 위주로 하여 말하고[四端主理而言] 칠정(七情)은 기를 위주로 하여 말한[若七情則主氣而言] 이황의 의견이 옳다고 하였다.
원집 권1에는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고 지은 「동정부(東征賦)」, 족질(族姪) 김시걸(金時傑)에게 지어준 「억원부(憶遠賦)」, 바람에 쓰러진 소나무를 읊은 「비송수부(悲松樹賦)」 등의 부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서 권6까지는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1673년(현종 14)부터 1702년(숙종 28)까지의 작품이 창작 시기순으로 편차(編次)되어 있고, 곳곳에 저자인 김창협이 스스로 단 주석[自註]과 『농암집』을 편찬한 사람이 단 주석[編者註]이 부기되어 있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원집 권7에 실려 있는 「관학청백관상복일종고례소(館學請百官喪服一從古禮疏)」 등 일련의 상소문(上疏文)은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사이에 있었던 예송(禮訟)의 연구 자료로서 매우 값진 것이다.
원집 권8의 「사호조참의소(辭戶曹參議疏)」는 그의 글 짓는 능력을 과시(誇示)한 명문(名文)으로 널리 알려져 온 것이다. 속집 권2에 붙인 「사단칠정설」은 그의 이학(理學) 체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논설(論說)이 되고 있다.
원집 권25 잡저의 「동음대(洞陰對)」는 김창협이 영평(永平)에서 은거(隱居)할 때 지은 글로, 김창협의 기개가 잘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호환(虎患)이 두렵다 하나 인간 세상에는 호환보다 더 무서운 일이 얼마든지 있음을 이야기하며, 비유를 통해 그윽한 동음(洞陰)에 숨어 사는 자기 뜻을 완곡하게 설명하고 있다. 뒷날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김수항(金壽恒)이 복권되면서, 작자인 김창협에게 예조판서(禮曹判書) · 대제학(大提學)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김창협은 끝내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권34 잡지 「외편」에 있는 여러 문장가(文章家)의 시문(詩文)에 대한 비평(批評)은 고문파 문장가이자 탁월한 문학 비평가(文學批評家)로서 김창협의 식견을 잘 보여 주는 좋은 자료이다. 우리나라 문학 비평사에서 그 자료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명나라 사람과 송나라 사람의 시학(詩學)에서부터 고려시대의 이색(李穡) · 이규보(李奎報), 당대의 한학 사대가(漢學四大家)인 장유(張維) · 이정귀(李廷龜) · 이식(李植) · 신흠(申欽)에 이르기까지를 비평하였다. 이러한 김창협의 비평은 그의 수준 높은 안목을 보여 주고 있다.
부록 권4에는 후인들이 작성한 「제가장소(諸家章疏)」 · 「제가찬술(諸家撰述)」 · 「제가기술잡록(諸家記述雜錄)」 등이 실려 있다. 「제가장소」는 김창협의 신주(神主)를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모실 것을 청한 소, 김창협의 신주를 문묘(文廟)에 모실 것을 청한 소,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사액(賜額)할 것을 청한 소, 김홍석(金弘錫) 등에게 무함(誣陷)을 당한 송시열(宋時烈) · 김창협을 변무(辨誣)하는 소 등으로 구성된다. 여기에 수록된 소는 어유봉 · 오희상(吳熙常) · 송상기(宋相琦) 등이 지은 것이다. 「제가찬술」은 어유봉이 지은 「주자대전차의문목후서(朱子大全箚疑問目後序) · 『오자수언(五子粹言)』의 서문 · 『논어상설(論語詳說)』의 발문」, 어유귀(魚有龜)가 지은 「서첩후소발(書帖後小跋)」, 김매순(金邁淳)이 지은 「선화찬(扇畫贊)」 등이며, 「제가기술잡록」은 문인과 사우들의 저술(著述)에서 저자 관련 기사를 뽑아 모아 놓은 것이다.
1980년 경문사에서 『농암전집(農巖全集)』으로 영인(影印) · 간행하였다.
김창협의 문집인 『농암집』은 저자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바로 간행되고 또 이후로 두세 차례 증보하여 간행될 만큼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이 책에는 사상가와 학자로서의 김창협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물론이고, 문인으로서의 김창협을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문학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농암집』은 조선 후기 철학사 ‧ 문학사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농암집』에는 당대의 정치나 정세와 관련한 자료들도 여기저기에 보이므로, 『농암집』은 정치사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