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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고문(唐宋古文)에 반대하여 진한(秦漢) 이전의 문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에 의하여 지어진 한문 문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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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의고문(擬古文)은 당송고문(唐宋古文)에 반대하여 진한(秦漢) 이전의 문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에 의하여 지어진 한문 문체이다. 당송고문이 유행한 이후,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두되었다. 중국에서는 명(明)나라 중엽 이후 유행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선조(宣祖) 이후 여러 고문 작가들에 의해 유행하였다. 진한시대 고문을 추숭하다가 결국 지나친 모방의 한계를 보이기도 했지만, 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진한고문 본래의 문체를 내재화하면서도 독자적인 미감과 의미를 산출하기도 하였으며, 당송시대 고문과 절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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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당송고문(唐宋古文)에 반대하여 진한(秦漢) 이전의 문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에 의하여 지어진 한문 문체.
내용

의고문(擬古文)을 창작하는 작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문이란 옛글과 똑같이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문학이란 시대의 산물로 몇백 년 혹은 몇천 년 전의 글과 똑같이 짓는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글은 옛글을 모방하여 고색(古色)이나 고향(古香)을 낸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에 입각하여 후대인들이 의고문이라 호칭하게 된 것이다. 당대(唐代)의 문장가 한유(韓愈)는 성률(聲律)과 대우(對偶)만을 추구하는 형식 위주의 변려문(騈儷文)이 판을 치는 사회상을 보고, 효용적이며 자유로운 문체를 추구하여 육조시대(六朝時代) 이전의 글을 배우자며 고문 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고대의 문장체로 복귀하자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적합한 창조적인 문장을 짓는 데 목적을 두었다. 송대(宋代)의 구양수(歐陽脩) · 증공(曾鞏) · 왕안석(王安石)과 소식(蘇軾) 3부자도 한유를 계승하여 고문을 제창하였다. 이들도 각자 그 시대에 맞는 자기 품격의 문장을 구사한 것이다. 선진시대(先秦時代)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이들은 복고라는 명칭을 내걸고 당시 문학의 폐단을 개혁하는 동시에 새로운 문학의 세계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고문을 본받는 문학적 사조가 원대를 거쳐 명대(明代)의 중엽까지 이어지다가 이몽양(李夢陽) · 하경명(河景明) 등에 의하여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었다. 즉 한유가 고문의 법을 망쳤다고 하면서 “문장은 반드시 진한 이전의 것을 배워야 하고, 시는 반드시 성당의 시를 배워야 한다[文必秦漢 詩必盛唐].”는 의고적(擬古的) 구호를 제창하였다. 이것을 계승한 이반룡(李攀龍) · 왕세정(王世貞) 등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온 천하가 의고풍에 휩쓸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의고문이 성행한 시기는 조선시대 선조 때부터 영 · 정조까지 약 200년 안팎의 세월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립(崔笠)신유한(申維翰)을 들 수가 있다. 최립은 명나라 이반룡과 왕세정을 직접 만났다고도 전해지며, 그들의 문학 이론을 흠모하여 진한의 고문을 쓰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간결하면서 굳세고, 작품 또한 교묘하기는 하였지만, 자가(自家)의 조화를 이루지 못한 험벽한 글이 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의고문가들은 당송고문가들과는 달리 『서경』의 문장체와 같이 어조사가 생략된 생경한 문체를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신유한은 당송고문의 대가인 한유와 구양수, 그리고 소식 3부자에 대하여 고문을 망쳤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임박(任璞)에게 주는 편지에서 “한유가 비로소 문장가의 문호를 세워 글의 궤범이 되었지만, 「송궁문(送窮文)」 · 「진학해(進學解)」는 과장한 흠이 있고, 「모영전(毛穎傳)」은 괴이한 점이 있으니, 고문체가 한유에 이르러 파괴되었다.”고 매도하였다. 신유한은 이어서 “구양수가 한유의 유파임을 내세워 스스로 고문가라고 하였고, 소씨 부자도 대방가(大方家)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유가 · 불가 · 도가 및 종횡가(縱橫家)를 섞어서 책론(策論)과 서기(序記)를 지었으니, 사마천(司馬遷) · 반고(班固)의 십분의 이삼도 따라가지 못하는데 어떻게 선진고문(先秦古文)을 거론하는가.”라고 가혹하게 비하하였다. 신유한의 논조는 명대 의고문가들이 당송팔가를 타도하던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남공철(南公徹)은 「아정집서(雅亭集序)」에서 그 당시의 사대부로서 문장에 능하다고 불리는 사람은 대체로 중국의 이반룡이나 왕세정의 무리와 내왕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하였다.

의고풍은 당시 당송고문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던 장유(張維)이식(李植) 같은 사람까지도 그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지적한 김택영(金澤榮)의 글을 보아도 저간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문장은 거의 의고풍의 영향이 컸었다. 그 중에도 특히 윤근수(尹根壽)신흠(申欽) · 허목(許穆)이 진한고문(秦漢古文)의 영향을 받은 거벽이다. 윤근수는 『청비록(淸脾錄)』에서 선진의 고문을 숭상하여 고문을 제창하였다. 신흠은 제자(諸子)와 『전국책(戰國策)』 등의 선진고문을 배웠고 명대의 전후칠자(前後七子)를 좋아하였다. 허목은 80 평생 고문을 좋아하여 진한 이후의 글은 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의 문체는 예스럽고 굳센 느낌을 주었다. 정조는 허목의 글을 칭찬하여 “기개가 우뚝하여 속세를 벗어난 면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긍섭(曺兢燮)은 “시대에 맞지 않아 흙으로 빚은 술잔에 옛 기운이 도는 것과 같다.”고 폄하하였다.

진한고문을 숭상하는 의고풍은 영 · 정조를 고비로 하여 쇠퇴하고 말았다. 그 영향은 한말까지도 지속되었다. 의고문가들의 근본적 의도는 가장 좋은 시문을 본받자는 것이었으므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없지 않다고 하겠다. 그러나 귀고천금(貴古賤今)의 입장을 취하였으니 오히려 퇴보적 문학관의 소산으로 평가된다. 더구나 이들은 “창작은 모의를 주로 한다[創作主摹擬].”라 하여 모방을 합리화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성률 · 격조 등 문학적 형식이나 율격만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히 글자마다 모의하고 글귀마다 비유하여 고대의 문장과 대비하는 극단적 모의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진한고문은 당송고문에 비하여 자구와 편장의 운용에서 변화무쌍함, 규칙과 그에 대한 위반이 함께 공존하며, 높은 서사성, 형상성이 돋보이며 강한 기세와 힘을 지닌다. 기실 우리나라에서는 진한고문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려는 산문이 활발히 창작되었는데, 중국의 전후칠자와 달리 송대 문학 특유의 유기성을 함께 추구하여 진한과 당송을 절충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진한고문을 지나치게 모의하고 그 의존도가 강해짐에 따라, 난삽하게 글을 쓰거나 표절의 비중이 높아지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지만, 또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여 진한고문의 문체를 내재화하면서도 독자적인 미감과 의미를 산출하며 나아가 문체뿐 아니라 진한고문의 정신에 깊이 공감하고 계승하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도련 외, 『한국문학연구입문』(지식산업사, 1982)

논문

김도련, 「고문(古文)의 원류와 성격-조선후기를 중심으로-」(『한국학논총』 2,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1979)
김우정, 「簡易 崔岦 散文 硏究」(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서한석, 「月汀 尹根壽의 散文에 關한 硏究: 擬古文風의 導入과 關聯하여」(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4)
하지영, 「18세기 秦漢古文論의 전개와 실현 양상」(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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