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장원(掌苑) 윤계정(尹繼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용(司勇) 윤희림(尹希林)이다. 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윤변(尹忭)이며, 어머니는 부사직(副司直)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동생이다. 김덕수(金德秀)·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용된 뒤, 승정원주서·춘추관기사관·연천군수 등을 거쳐 1562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 때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을 청했다가 과천현감으로 체직되었다.
이듬 해 8월 행신(倖臣) 이량(李樑)이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하자 형 윤두수, 박소립(朴素立), 기대승(奇大升) 등이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 이량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해 9월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우의정 심통원(沈通源)의 계문(啓文: 왕에게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올리는 글)으로 죄가 없음이 밝혀져 승문원 검교에 서용되었으나, 형 윤두수가 이조전랑이어서 취임하지 않았다.
1565년 홍문관부교리로 다시 기용된 뒤 이조좌랑·정랑(正郎)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해 의정부사인·지제교 겸 교서관교리(知製敎兼校書館校理)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검상·사인·장령·집의·사예·부응교 등을 역임했으며, 1572년(선조 5)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에 승진하였다. 이듬 해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 명나라 『태조실록』과『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를 하였다.
그 뒤 경상도감사·부제학·개경유수·공조참판 등을 거쳐 158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귀국할 때 『대명회전전서(大明會典全書)』를 가져왔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591년 우찬성으로 정철(鄭澈)이 건저(建儲: 세자 책봉) 문제로 화를 입자, 윤근수가 정철에게 당부했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형 윤두수와 함께 삭탈관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문안사(問安使)·원접사(遠接使)·주청사 등으로 여러 차례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국난 극복에 노력하였다.
그 뒤 판중추부사를 거쳐 좌찬성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했고,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1606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를 조(祖)로 할 것을 주장해 실현시켰다.
청백간손(淸白簡遜)하고 문장이 고아하며 필법이 주경(遒勁: 그림이나 글씨 등에서 붓의 힘이 굳셈)해 예원(藝苑)의 종장(宗匠)이라 일컬어졌다 한다. 저서로는 『사서토석(四書吐釋)』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