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권 22책의 초간본 목판본(木版本), 68권 20책의 중간본 목판본이 있다. 한편 7권 2책의 별집 목판본과 2권 1책의 연보가 있다. 초간본은 연세대에 소장되어 있고, 중간본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별집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별집이 포함된 전본(全本)은 규장각 · 장서각 · 국립중앙도서관 · 고려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정귀(李廷龜, 1564~1635)가 생전에 스스로 편집한 초고[自編稿]를 토대로, 작자가 죽은 지 1년 후인 1636년(인조 14)에 74권 22책의 목판본으로 간행(刊行)되었다. 이것이 초간본으로, 저자의 아들 이명한(李明漢)과 이소한(李昭漢)이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있던 작자의 제자 최유해(崔有海)에게 교정(校訂)과 간행을 부탁한 것이다.
그 후 초간본의 판목(版木)이 훼손되거나 흩어지고 없어지자, 손자 이익상(李翊相)과 증손 이희조(李喜朝) 등이 문집을 다시 간행하길 계획하였다. 그래서 손자 이단상(李端相)의 벗이었던 민정중(閔鼎重)과 경상감사(慶尙監司) 이세화(李世華)의 협조를 받아, 1688년(숙종 14)에 경상감영에서 68권 20책의 목판으로 중간본을 간행하였다.
별집의 간행은 중간본 간행에도 참여하였던 증손 이희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희조는 이명한과 이소한 때부터 추가로 간행하려 했지만 미처 간행하지 못한 유고(遺稿)의 간행에 관심을 기울여, 잡저(雜著) · 서독(書牘) · 신도비명(神道碑銘) · 시장(諡狀) · 부록(附錄) 등을 별집 7권 2책으로 구성하고, 1720년(숙종 46)에 종질(從姪)인 대구판관(大邱判官) 이우신(李雨臣)의 도움을 받아 대구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한편 연보 목판본 2권 1책이 1982년에 경문사(景文社)에서 영인(影印)한 『월사집』에 실려 있는데, 간행 연도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794년(정조 18) 11월의 기사(記事)까지 실린 것으로 보아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68권 20책의 중간본은 원집 63권과 부록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집의 앞뒤에는 왕휘(汪煇) · 강왈광(姜曰廣) · 양지원(梁之垣) · 장유(張維) ·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문(序文)과 최유해 · 안방준(安邦俊) 등의 발문(跋文)이 있다.
권1∼18은 시 1,660여 수, 권19 · 20은 「대학강의(大學講義)」, 권21은 「무술변무록(戊戌辨誣錄)」, 권22는 주(奏) 13편, 권23은 자(咨) 16편, 권24는 계(啓) 2편, 게(揭) 34편, 권25는 게 34편, 권26은 연중계사(筵中啓事) 7편, 연중강의(筵中講義) 5편, 권27은 계사(啓辭) 19편, 권28은 의(議) 18편, 권29는 소(疏) 17편, 권30∼32는 차(箚) 61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33은 잡저와 책문으로, 잡저에는 문(文) 2편, 설(說) 1편, 표 2편이 수록되어 있고, 책문이 8편 수록되어 있다. 권34는 간첩(簡帖) 25편, 권35 · 36은 서독 47편, 권37 · 38은 기(記) 25편, 권39 · 40은 서(序) 29편, 권41은 발(跋) 9편, 상량문(上樑文) 2편, 권42∼44는 신도비명 26편, 권45는 비명(碑銘) 4편, 권46 · 47은 묘갈명(墓碣銘) 23편, 권48은 묘지명(墓誌銘) 8편, 권49는 묘지명 1편, 묘표(墓表) 8편, 비음기(碑陰記) 2편, 권50∼52는 행장(行狀) 5편, 권53 · 54는 시장 2편, 권55는 제문(祭文) 22편, 권56은 제문 15편, 애사(哀詞) 1편, 권57은 표전(表箋) 27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58은 책문 8편, 교명문(敎命文) 3편, 반교문(頒敎文) 11편, 교서(敎書) 2편, 악장(樂章) 2편, 가요(歌謠) 1편, 권59는 정문(呈文) 4편, 서계(書啓) 5편, 권60∼62는 남궁록(南宮錄)으로 권60은 계사 21편, 권61은 계사 35편, 노포(露布) 1편, 권62는 계사 45편, 권63은 경신조천기사(庚申朝天紀事)로 「만력황제대행의(萬曆皇帝大行儀)」 · 「태창황제등극의(泰昌皇帝登極儀)」 등이 수록되어 있다.
별집 권1∼3은 잡저 13편, 권4는 차 3편, 계 2편, 권5는 간첩 1편, 서독 14편, 권6은 신도비명 6편, 묘갈명 5편, 묘표 1편, 시장 1편, 권7은 별집 부록으로 유사와 월사집발(月沙集跋) 등으로 되어 있다. 부록 권1은 제문 23편, 만장(挽章) 33수, 권2는 행장 1편, 권3은 시장 1편, 권4는 묘지명 1편, 권5에 신도비명 1편, 그리고 연보 2권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부터 권18까지의 시는 「수창록(酬唱錄)」 · 『조천록(朝天錄)』 · 「동사록(東槎錄)」 등과 같이 일정한 기간과 목적 아래 지은 글들을 작은 제목으로 묶었다. 그 글이나 시의 제목 아래에 시를 짓게 된 배경이나 동기 등이 서술되어 있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행(使行)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중국이나 일본을 오가는 과정에서 지은 기행시(紀行詩)가 많은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이정귀의 문학은 유교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전통적인 사대부(士大夫) 문학의 규범으로 평가받았다. 이정귀의 시 작품은 대부분 주지번(朱之蕃) · 웅화(熊化) · 양지원 등 중국 사신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읊었거나, 외교 임무를 같이 수행했던 이항복(李恒福) · 이안눌(李安訥) · 권필(權韠) · 차천로(車天輅) 등 당시의 문필가(文筆家)들과 주고받은 것들이다.
왕휘는 서문에서 이정귀의 시는 음운이 크고 맑으며 기개가 뛰어나다고 하며, “실에 꿴 꽃이 더욱 새롭고, 마른 잎에 물기가 도는 듯하여 생동하는 뜻이 넘쳐흐르고 신기한 이치가 반짝인다.”라고 극찬하였다. 그래서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와 맞먹어 위로는 한나라나 위진 시대의 글보다 낫고 아래로는 당나라를 능가한다고 평하고 있다.
권19‧20의 「대학강의」는 명나라 장수 송응창(宋應昌)의 청으로 황신(黃愼) · 유몽인(柳夢寅) 등과 함께 막중에서 『대학』을 강론한 것이다. 『대학』의 경1장에서부터 전10장까지의 내용에 걸쳐 명명덕(明明德) · 신민(新民) · 지어지선(止於至善) · 격물치지(格物致知) · 성의정심(誠意正心) 등 핵심적인 내용에 관한 해석이 있다. 해석 아래에는 하간부 통판(河間府通判) 왕군영(王君榮)의 강기(講記(講語))가 부기되어 있다. 명나라 장수들은 당시 중국의 학계를 지배하던 양명학(陽明學)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학자들이 정주학(程朱學)에 따라 경전을 풀이하는 것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다. 송시열은 서에서 「대학강의」에 대하여, “「대학강의」가 한번 나오자, 장구의 훈고가 각기 그 바름을 얻으니, 이것은 성현(聖賢)의 종지(宗旨)요 공자 문하[孔門]의 의발(衣鉢)이다.”라고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이정귀가 시보다는 문장으로 명망이 있었던 만큼, 그의 문집인 『월사집』에도 주 · 자 · 책문(冊文)을 비롯한 공식적인 글은 물론이고 많은 분량의 서(序) · 신도비명 · 묘갈명 · 행장 등이 실려 있다.
권21의 「무술변무록」은 이른바 「변무주(辨誣奏)」로 불리는데, 주 1편과 정문 4편으로 되어 있다. 1598년에 명나라의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고자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고 거짓으로 고발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이정귀가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서 그것이 무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 글이다. 송시열은 또 서에서 이 「변무주」를 평하여 “그가 황제께 주문(奏文)을 올리자 오랑캐가 순종하게 되어 모두 그 바름을 얻으니, 이에 천지의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常經]요 오늘날에도 통하는 의리[通義]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권22의 주는 대부분 중국에 변무(辨誣)한 것이고, 권23부터 권25까지의 자와 게는 조선에 와 있던 명나라 장수들에게 보낸 것이다. 권28의 의는 당시 왜 및 여진의 조선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고, 권29부터 권32까지의 소차(疏箚)는 대부분이 사직(社稷)에 관한 내용이나 당시의 정사(政事)를 논한 것도 있다.
권34의 간첩은 웅화 · 왕휘 · 마총(馬驄) 등 중국 문인들과 주고받은 글이며, 권35‧36의 서독에는 이항복 · 신흠(申欽) · 김장생(金長生) 등 국내 인사들과 왕래한 편지글들을 모아 놓았는데, 주로 폐축기에 쓰인 것들이다.
권37은 서원 · 누각 · 당(堂) · 정자 등의 기문(記文)이고, 권38은 모두 산천 · 절 · 서원 등을 유람하면서 지은 유기(遊記)이다.
권39‧40에는 총 29편의 서문이, 권41에는 9편의 발문과 2편의 상량문이 실려 있다. 「습재집서(習齋集序)」 · 「옥봉집서(玉峯集序)」 · 「상촌집서(象村集序)」 · 「석주집서(石洲集序)」 등의 서문에는 이정귀의 문학관이 보인다.
권42부터 권56까지는 26편의 신도비명과 23편의 묘갈명, 5편의 행장, 37편의 제문 등의 비지류(碑誌類)가 실려 있다.
권60에서 권62까지의 「남궁록(南宮錄)」에는 이정귀가 9번이나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내면서 국가의 전례(典禮)가 문제 될 때마다 의견을 밝힌 100여 편의 계사가 수록되어 있다.
5권 분량의 부록에는 이정귀에게 바쳐진 23편의 제문과 33편의 만사(輓詞)가 수록되어 있다. 이정귀의 행장은 조익(趙翼)이, 시장은 장유가, 묘지(墓誌)는 이식(李植)이, 비명은 김상헌(金尙憲)이 지었다.
별집의 잡저는 임진왜란 전후의 국내외 정세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월사집』은 이정귀의 문학적인 연구를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을 전후한 조선 사회 내외의 전체적인 정세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다. 이정귀가 한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지니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에게 베푸는 마음으로 국정에 임한 정치인으로서도 중요한 몫을 하였기 때문이다.
김상헌은 신도비명에서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장유도 또한 시장에서 “그의 문장은 섬민(贍敏)하고 창달하여 어렵고 막히는 데가 없어 임금께서 그의 문장을 가장 좋아하였으며, 한때의 문사에 능하다는 이도 모두 그의 아래에 있다.”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월사집』을 통해서 우리는 당대 긴박한 국제 현실과 여전히 명분에 사로잡혀 있던 국내 정치 상황, 그 속에서 힘을 다해 피폐해진 조선이 살아남을 길을 모색한 여러 인물들의 움직임을 포착해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