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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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사집 / 무술변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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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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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글.
내용

조선 중기에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글. 본래의 제목은 ‘정주사응태참론본국변무주(丁主事應泰參論本國辨誣奏)’이며,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라고도 한다. ≪월사집 月沙集≫ 권21의 <무술변무록>에 정문(呈文) 4편과 함께 실려 있다. 이정구가 35세 되던 1598년(선조 31)에 지은 총 3,309자로 된 장문이다.

정응태가 조선이 왜적과 제휴하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고 중국 조정에 무고한 사실을 중국황제에게 변명한 글이다. 정응태의 무고 사건이 발생하자 당황한 조정에서는 이항복(李恒福)을 변무사로 정하고, 승문원 교리로 있던 이정구를 변무부사로서 선발하였다. 이때에 지은 주소문이 바로 <변무주>이다.

문장의 내용은 대략 9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단은 서언으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비유하여 조선의 억울한 사정을 간절히 호소하였다. 제2단은 군신의 정리를 떠난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변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억울한 사정을 나타내었다.

제3단은 왜국의 사람들을 꾀어 들인다고 한 내용에 대한 해명이다. 예전부터 왜와 교린우호를 취한 것은 변방을 수호하는 수단이었다. 왜와 함께 중국을 도모하려고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말하였다.

제4단에서는 ≪해동제국기≫에 중국연호를 주로 작게 쓴 것은 신숙주(申叔舟) 개인이 여러 나라의 기문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는 큰 의미가 없음을 밝혔다. 제5단에서는 조선의 역대군왕이 조(祖)라고 한 것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여 그간의 외람됨을 시인하였다.

그 밖의 문물제도를 달리하고 있다고 한 것은 사실과 다름을 설명하였다. 제6단에서는 국방에 힘쓴다는 말에 대해 변명하였다. 제7단에서는 왜를 불러 옛땅을 회복하려 한다는 말에 대한 해명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중국과 조선이 협력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그런데 지금 왜와 중국을 친다는 것은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제8단에서는 정응태가 무고한 이유를 열거하였다. 제9단에서는 결론을 맺었다. 중국의 각료들이 이 주문을 보고 한결같이 ‘좋은 문장’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변무주>를 통해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보았다.

<변무주>는 ‘곡진·간측·온자·전중’하다는 평을 받았다. 선조도 이정구의 문장에 대해 “글이 폐부에서 나오기 때문에 곡진하고 간절하다.”라고 하였다. ≪운양만록≫·≪송천필담≫ 등에서도 이 글이 ‘천하제일의 문장’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글은 선조 조의 현안문제를 해결한 외교적 성과 때문에 화국문장의 정종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리고 이에 부응하여 저자의 문명을 천하에 알리는 역할도 하였다.

참고문헌

『월사집(月沙集)』
「월사의 문학관과 변무록」(이종찬, 『한국한문학연구』 제2집, 한국한문학연구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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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윤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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