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초사(楚辭)’ 혹은 ‘소(騷)’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초나라 땅에서 지어져 초사라고 불렀고, 굴원(屈原)의 「이소(離騷)」가 대표적인 사이기 때문에 소라고도 하였던 것이다. 이들 명칭이 너무 협의적인 표현이라 생각하여 후세에는 이러한 유형의 작품들을 일반적으로 사라 부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사(辭)와 부(賦)는 나눌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사와 부를 사부라고 통합하여 불렀다. 김석주의 『해동사부(海東辭賦)』에서도 사와 부의 구별을 하지 않고 사부라 하였고, 작품도 사와 부를 함께 구별 없이 수록하였다. 간혹 사와 부를 나누어 따로 사용할 경우도 별 구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와 부를 구별한 것은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에서 보인다. “부에는 「이소」보다 깊은 게 없고, 사에는 「상여(相如)」보다 아름다운 게 없다.”라고 한 것이다. 부는 한대에 이르러 특정한 체제를 형성하였다. 부는 『초사』의 한 형식을 계승한 것이다. 그렇지만 비교적 산문의 수법을 많이 운용하여 사와는 다르게 발달하였다.
부는 웅대하거나 독특한 사물들을 아름답고 멋지게 표현하려고 애쓴 서사적 작품이고 사는 우수와 격정 같은 것을 남방가요의 아름다운 형식을 빌려 표현하고 있는 서정적인 작품이다.
사 작품 가운데 이인로(李仁老)의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가 최초의 작품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에 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으로 계승되었다. 이들 이후에는 그리 왕성한 창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석주(金錫胄)의 『해동사부』에 선록된 58편 가운데 사는 6편 밖에 실리지 않았다. 『동문선』에는 사와 부를 나누어 독립시켜 작품을 수록하였다. 권1의 첫머리에 「화귀거래사」·「산중사(山中辭)」·「민지사(閔志辭)」 등 10편을 싣고, 이어서 부를 싣고 있다.
『속동문선』에도 사가 부와 분리되어 서거정(徐居正)의 「불암사위전상인작(佛巖辭爲專上人作)」, 강희맹(姜希孟)의 「향산사(香山辭)」 등 7편의 사가 수록되어 있다. 『문선(文選)』에서도 사를 독립해서 하나의 문체로 세워 부·시 등과 함께 나란히 벌여 놓고, 한무제의 「추풍사(秋風辭)」,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사체의 대표적 작품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