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내릴 경우에는 조서(詔書) 또는 칙서(勅書)라고 한다. 원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전의 고려와 대한제국시대에는 조서라 하였다. 한편, 왕세자가 왕을 대신해서 대리청정할 때 왕세자가 내리는 유훈을 영서(令書)라고 하는데 이것은 왕의 교서와 같은 효력을 가진다.
교서의 종류는 내용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면, 즉위교서(卽位敎書) · 구언교서(求言敎書) · 공신녹훈교서(功臣錄勳敎書) · 배향교서(配享敎書) · 문묘종사교서(文廟從祀敎書) · 반사교서(頒赦敎書)가 있다.
그 밖에 사여(賜與) · 권농(勸農) · 사명훈유(使命訓諭) · 봉작(封爵) · 책봉(冊封) · 가례(嘉禮) · 납징(納徵) · 포장(褒奬) 등의 교서가 있다. 교서 또는 조서는 대개 문신이 제진(製進)하여 왕의 열람(閱覽) 또는 청문(聽聞)을 거치게 된다.
교서는 원문서(原文書) 그대로 전래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경우는 발급된 교서의 수에 비하면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원문서 상태의 교서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 『승정원일기』 · 『일성록』 등 관찬사서(官撰史書)와 『동문선(東文選)』 등에 전재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전재 또는 전사(傳寫)된 것은 고문서로서의 성격을 상실한 것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교서 가운데에는 관찬사서나 문집류에 전재되지 않은 것이 상당수 있으며, 그 중에는 그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긴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 많이 있다.
특히 현재 전해지고 있는 교서 중에는 개인에게 내려진 공신교서(功臣敎書) · 사명훈유교서(使命訓諭敎書)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그 가문의 영예를 상징하는 유산이기 때문이다.
공신교서로서는 1401년(태종 1)에 마천목(馬天牧)에게 내린 좌명공신교서(佐命功臣敎書), 1468년(세조 13)에 허종(許琮)에게 내린 적개공신교서(敵愾功臣敎書)가 있다.
또한 1979년 보물로 지정된 연안이씨 종중 문적 중 1472년(성종 3)에 이숭원(李崇元)에게 내린 좌리공신교서(佐理功臣敎書), 1507년(중종 2)에 신은윤(辛殷尹)에게 내린 정국공신교서(靖國功臣敎書), 1604년(선조 37) 유성룡(柳成龍)에게 내린 호성공신교서(扈聖功臣敎書) 등이 있다.
사명훈유교서로서는 1592년에 도체찰사 유성룡에게 내린 교서, 1638년(인조 16)에 충청도관찰사 김육(金堉)에게 내린 교서 등이 있다.
교서의 문서식은 ‘敎具銜姓名(또는 某某人等)書 王若曰云云(事實)故玆敎示想宜知悉 年號幾年某月某日’ 이다. 구언교서일 경우에는 결사(結辭)를 ‘故玆敎示想宜知悉’ 대신에 ‘咨爾政府體予至意布敎中外咸使聞知’ 또는 ‘咨爾臣僚體予至懷’라고 쓴다. 연호 위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