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는 작자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한문 문체이다. 한나라 사마상여가 ‘한부(漢賦)’라는 새로운 문체로 어떤 일이나 물건을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부는 시대에 따라 고부, 금부, 초사체, 양한체, 삼국육조체, 당체, 송체로 나눈다. 신분에 따라 시인의 부, 소인(騷人)의 부, 사인의 부가 있고, 문체에 따라 배부, 율부, 문부가 있다. 부는 형식주의적이고 귀족적 성향을 띠고 있어 부정적인 보기가 쉽다. 그러나 한문 문장의 다양한 표현을 개발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부는 본래 『시경』의 표현방법의 하나로서, 작자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이후 굴원(屈原)의 『초사(楚辭)』를 계승한 송옥(宋玉) 등에 의하여 하나의 문학 장르로 정립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아름다운 글을 통한 풍유(諷諭)에 목적을 두고 있다.
한(漢)대 사마상여(司馬相如)는 내용과 형식이 『초사』와는 달라진 ‘한부(漢賦)’라는 새로운 문체로 발전시켰다. 그 문체는 시(詩)적인 측면보다는 산문적인 성분이 늘어난 것이다. 내용 면에서는 개성이나 개인의 감정이 사라지고 일정한 일이나 물건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일 자체에 더욱 중점이 놓여지게 되었다.
한나라의 황실에서는 『초사』를 애호하였다. 그래서 사마상여는 자기의 문재(文才)를 총동원하여 미사여구(美辭麗句)를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부는 듣는 이의 귀와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하려는 방향으로 형성,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유협(劉勰)이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부란 펼친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채색을 펼치고 무늬를 이룩하여 사물을 묘사하고 뜻을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부의 문체를 정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나라의 양웅(揚雄)은 부의 종류를 ‘시인(詩人)의 부’와 ‘소인(騷人)의 부’로 나누었다. 진(晉)나라 지우(摯虞)는 부의 종류를 고부(古賦)와 금부(今賦)로 나누고, 원(元)나라 축요(祝堯)는 ‘시인의 부’ · ‘소인의 부’ · ‘사인(詞人)의 부’로 나누었다.
시대적으로는 대체로 부의 종류를 ‘초사체(楚辭體)’ · ‘양한체(兩漢體)’ · ‘삼국육조체(三國六朝體)’ · ‘당체(唐體)’ · ‘송체(宋體)’로 분류한다. 그런데 명나라 서사증(徐師曾)의 『문체명변(文體明辨)』에서는 ‘초사체’와 ‘양한체’는 모두 고부(古賦)로 일괄하여 처리하였다. 다시 후대의 부들은 문체에 따라 배부(排賦) · 율부(律賦) · 문부(文賦)로 분류하고 있다. 부의 구성은 대체로 직서체(直敍體)와 문답체(問答體)로 나누어진다. 한편의 부는 대개 서(序) · 본문 · 결어의 3단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부는 꼭 3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구법(句法)은 『초사』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산문화하여 ‘혜(兮)’자를 쓰지 않고 4자구를 쓰면서 중간에 3자구나 6자구를 섞어 변화를 일으키는 작품도 있다. 부의 형식과 내용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한두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다.
배부는 서진(西晉)의 반악(潘岳)과 육기(陸機) 등에게서 시작하여, 송나라 이후 육조시대(420∼589)에 성행하였던 문체이다. 반악과 육기는 부의 수사(修辭)에 더욱 공을 들여 대구(對句)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뒤에 나타나는 변려문(騈儷文)의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를 변부(騈賦)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송나라 이후로는 시와 마찬가지로 부에 있어서도 더욱 형식적인 문장 수식에 노력하여 부의 음률효과까지도 중시하게 된다. 그 결과 아름다운 대구를 이루는 문사(文辭)를 늘어놓은 배부라는 형식주의적인 문체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율부는 당대에 이르러 과거(科擧)에 시부(詩賦)를 출제함으로써 생겨난 더욱 규식화(規式化)된 부체이다. 율부는 대구와 평측(平仄)의 음률까지도 중시하였다. 이것은 심약(沈約)의 사성(四聲) · 팔병(八病)의 이론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시의 근체(近體)에 해당하는 부체라고 할 것이다. 다만 율부는 부의 내용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문장의 형식만을 중시했다. 이 점이 시와는 다르다. 율부는 송나라 초기에 과거에도 채용되었다.
문부는 송나라 구양수(歐陽修) 이후에 산문인 고문(古文)이 성행하면서 그 영향 하에서 이루어진 부체이다. 문부는 변려문을 배격하고 산문화한 것이 특징이다. 구양수의 「추성부(秋聲賦)」와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 같은 명작들이 남아 있다. 문부는 형식적인 율부와는 달리 개성적인 창의(創意)가 담긴 새로운 부체이다. 구양수 · 소식 이후에는 그들의 작품을 뒤따를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신라 최치원(崔致遠)의 「영효부(咏曉賦)」가 우리 나라의 첫 번째 부 작품이다. 그 형식은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율부와 같이 대우(對偶)와 환운(換韻)을 쓰고 있다. 고려 때에는 부를 과거시험의 과목으로 정했다. 그에 따라 최충(崔冲)의 사숙(私塾)인 구재(九齋) 같은 데에서도 부를 학습하였다. 그리고 ‘양경시부(良鏡詩賦)’라고 노래된 것을 보면 많은 작품을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령문(功令文)이어서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은 듯하다.
『동문선』에 전하는 최초의 작품은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의 「중니봉부(仲尼鳳賦)」와 「아계부(啞鷄賦)」이다. 앞의 것은 공자와 봉(鳳)의 덕을 읊었고, 뒤의 것은 닭을 빌려 특정인물을 풍유한 것이다. 형식은 고부에 가깝다.
이규보(李奎報)는 부에 있어서 다양한 문재를 발휘하여 훌륭한 작품을 남긴 작가이다. 기발한 우의(寓意)로 가탁된 「외부(畏賦)」는 문부체이고, 허무한 인생의 달관을 주제로 한 「몽비부(夢悲賦)」는 고부체이다. 물성(物性)을 통하여 인성(人性)을 풍유한 「방선부(放蟬賦)」, 낙천지명(樂天知命)의 인생관을 담은 「조강부(祖江賦)」, 인정의 감응상(感應相)을 논리적으로 편 「춘망부(春望賦)」 등은 걸작이다.
부는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를 비롯하여 작품은 인성(人性)이나 사리 · 물정, 혹은 역사사실을 논설한 설리적인 것이 많다. 고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부 작품 역시 형식과 체재 면에서 고려시대와 별로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근원적으로는 중국 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한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 그것은 조선 후기에 과거시험 과목으로 쓰인 과부(科賦)이다. 과부는 주로 중국의 역사사실이나 옛 시문의 한 구절을 주제로 삼아 1구6언으로 30구에서 60구까지 지었다. 일정한 압운도 없고 각 구 제3언 다음에 대개 허자를 써서 구의 호흡을 조절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율부처럼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여 문집에 전하지 않았다. 선비들이 과거 응시 이전에 습작하기 위하여 전인의 잘된 작품을 초록해두었던 것이 간혹 보일 뿐이다. 부는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고 귀족적 성향을 띠고 있어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가 쉽다. 그러나 한문 문장의 다양한 표현 가능성을 개발하는 데는 큰 공헌을 하였다. 따라서 부의 발달을 통하여 한문 문장의 수사기교와 음운의 해화(諧和)가 한층 더 발달할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부는 중국과 어음이 달라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