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갈’과 ‘묘비(墓碑)’는 본래 묘소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 본래는 구분되었으나 후대에 와서 서로 통용되었다. 『후한서(後漢書)』의 주(注)에 “네모진 것이 비, 둥근 것이 갈이다.” 하였고, 진역증(陳繹曾)은 “비의 체재는 웅혼전아(雄渾典雅: 기운차고 원숙하며 고상함.)하고, 갈의 체재는 질실전아(質實典雅: 소박하고 고상함.)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대(唐代)에 와서는 관직이 4품 이상은 귀부이수(龜趺螭首: 거북모양을 새긴 비석의 받침돌과 용모양을 새긴 비석의 머릿돌)인 비를 세울 수 있고, 5품 이하는 방부원수(方趺圓首)인 갈을 세우도록 규제하였다.
그런데 후대에는 비와 갈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문헌상의 최초의 갈은 진(晉)나라 때 반니(潘尼)의 반황문갈(潘黃門碣)이다. 그러나 그 뒤에 갈이라 이름을 붙인 비석은 많지 않다. 간혹 있다 하여도 높다랗게 크게 세워 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갈’의 서법은 갈명(碣銘) · 갈(碣) · 갈명병서(碣銘幷序) 등으로 제목이 각기 다르게 호칭되지만 결과는 ‘비’와 같다. 그래서 명(銘)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갈’이라고 하고서 명을 붙이기도 하고, ‘갈명’이라 하고도 명을 붙이지 않기도 하여 엄격한 전칙이 없다.
묘갈의 특징은 엄정한 시비 선악을 판단하여 결정하는 포폄의식(褒貶意識)에 의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은이의 방명(芳名)을 후세에 유전시키려는 것이 사명이므로, 긍정적인 측면에서만 기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객관적 시각에서 한 개인의 진실된 삶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사가의 열전(列傳)과는 다르게, 나쁜 것은 빼고 좋은 점만을 기록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용면에서 재료적 가치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묘갈은 서사(敍事)를 위주로 하는 정체(正體)와 의론(議論)을 위주로 하는 변체(變體)가 있다. 혹은 선계(先系)를 먼저 서술하고 다음에 공덕과 손록(孫錄: 후손들의 계보를 기록함.)을 기술하는 경우가 있고, 혹은 공덕부터 먼저 표양하고 선계와 손록을 적는 경우가 있다. 명은 운문(韻文)으로 사언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나 오언 · 칠언 장단구(長短句)로 된 것도 적지 않다.
우리 나라의 갈은 고려시대 최충(崔沖)의 「홍경사갈(弘慶寺碣)」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묘갈을 찾아볼 수 없고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움트기 시작하다가 중엽 이후에 성행하게 된다. 특히 송시열(宋時烈)이 많은 작품을 남겨서 후대 금석가(金石家)의 표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