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초명은 종유(宗裕) 또는 안(安). 자는 수덕(樹德), 호는 동산수(東山叟). 명유(名儒)인 문헌공 최충(崔冲)의 6대손이다. 우복야 최민(崔敏)의 아들이다.
1212년(강종 1)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이 되었다. 치적이 우수하여 국자감 학유(國子監學諭)에 이르렀다. 그 뒤에 10년간은 관운이 트이지 않다가 「우미인초가(虞美人草歌)」 · 「수정배시(水精盃詩)」로써 이규보(李奎報)에게 알려져 이것이 출세의 계기가 되었다.
최이(崔怡)가 문병(文柄)을 잡을 만한 후계자를 묻자, 이규보는 최자를 첫째로 추천하였다. 그래서 문재(文才)를 열번 시험하였다. 다섯번 1등을 하고 다섯번은 2등을 하였다. 다시 이재(吏才)를 시험하려고 급전도감녹사(給田都監錄事)를 시키자 민첩하고 근면하여 인정을 받았다.
한때에 제주태수로 있었다. 고종 때에 정언을 거쳐서 상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내직으로 전중소감(殿中少監) ·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를 역임하였다. 1233년(고종 20)에 최린(崔璘) · 권술(權述)과 함께 금나라로 문안사행을 갔다.
한 때에 충청 · 전라 안찰사가 되었다. 그 뒤에 국자감대사성 ·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 상서우복야 · 한림학사 승지를 역임하고, 추밀부사가 되어 1250년 2월 중서사인(中書舍人) 홍진(洪縉)과 함께 몽골에 들어갔다.
1256년 11월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가 되었다. 다시 수태사(守太師) · 문하시랑 ·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더해졌다. 1258년 유경(柳璥) · 김준(金俊) 등이 최의(崔竩)를 죽여서 4대째 내려오던 최씨정권이 무너졌다.
이때에 수상으로서 난국을 잘 타개하였다. 1259년 1월 몽골의 침입이 있자 고관들 사이에서는 항복과 항전을 두고 중론이 분분하였다. 추밀원사 김보정(金寶鼎)과 함께 강도(江都)는 땅이 넓고 사람이 적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면서 나아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시문에 뛰어나서 당대에 크게 문명을 떨쳤다.
문학평론사상 최자는 이인로(李仁老)와 함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규보의 문학관을 잇고 있다. 문학비평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또한, 학식과 행정력을 겸비하여 많은 치적을 쌓았다.
그러나 최충헌의 노속(奴屬)으로 있는 김준이 최이의 신임을 받는 것을 보고 김준의 아들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열어 웃음거리가 된 일도 있었다.
최자의 저서로 『최문충공가집(崔文忠公家集)』 10권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속파한집(續破閑集)』(『보한집(補閑集)』으로 고쳐 부름) 3권이 현전한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시 1편이, 『동문선(東文選)』에 부(賦) 2편, 시 10편, 기타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