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종 때 습유(拾遺)라는 명칭으로 두었던 것을 1116년(예종 11)에 고쳐 정언이라 하였다. 소속관원은 목종 때와 같이 좌우 각 1인씩을 두고 품계는 종6품으로 하였다.
1308년(충렬왕 34)에 충선왕이 사보(思補)로 고치고 정6품으로 올렸으나 1356년(공민왕 5)에 명칭을 다시 정언으로 하였다. 주요직능은 낭관으로서 간쟁(諫爭)과 봉박(封駁)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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