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로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다. 화엄승통(華嚴僧統)인 요일(寥一)이 그를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켰다. 그래서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1170년 그의 나이 19세 때에 정중부(鄭仲夫)가 무신란을 일으키고, “문관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 하며 횡행하자, 피신하여 불문(佛門)에 귀의하였다. 그 뒤에 환속하였다.
이인로는 25세 때에 태학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두루 학습하였다. 1180년(명종 10) 29세 때에는 진사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31세 때인 1182년 금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다. 다음해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문극겸(文克謙)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되어 사소(詞疏)를 담당하였다. 한림원에서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그는 조칙(詔勅)을 짓는 여가에도 시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복고(腹藁)’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이인로는 임춘(林椿) · 오세재(吳世才) 등과 어울려 시와 술로 즐기며 세칭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 · 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아들 세황(世黃)의 기록에 의하면 “문장의 역량을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좌간의대부에 올라 시관(試官)의 명을 받았다. 그러나 시석(試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좌간의대부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열전(列傳)에서 이인로에 대하여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性偏急 忤當世 不爲大用).”라고 평하였다. 그 자신은 문학 역량에 대하여 자부가 컸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여 이상과 현실간의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인로의 문학사상의 골자는 시의 본질과 그 독자적 가치에 대한 인식, 그리고 ‘어의구묘(語意俱妙)’를 강조한 작시론(作詩論)이라 하겠다. 또한 어묘를 위해서는 무부착지흔(無斧鑿之痕)의 자연생성의 경지를, 의묘(意妙)를 위해서는 신의(新意)를 중시하였다.
이인로는 『은대집(銀臺集)』 · 『파한집』을 짓고 『쌍명재집』을 편찬했다고 하나, 『파한집』만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