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을 상고하면 의종 무렵에 태어나 30대 후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춘은 일찍부터 유교적 교양과 문학으로 입신할 것을 표방하여 무신란 이전에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그러다가 20세 전후에 무신란을 만나 가문 전체가 화를 입었다. 그는 겨우 피신하여 목숨은 부지하였다. 그러나 조상 대대의 공음전(功蔭田)까지 탈취당하였다.
그는 개경에서 5년간 은신하다가 가족을 이끌고 영남지방으로 피신하였다. 약 7년 여의 유락(流落)을 겪었다.
그런 생활 중에서도 당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에게 벼슬을 구하는 편지를 쓰는 등의 자천(自薦)을 시도하였다. 다시 개경으로 올라와 과거준비까지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의와 빈곤 속에 방황하다가 일찍 죽고 말았다.
임춘은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현실인식의 태도에 있어 유자(儒者)로서의 입신행도의 현실관을 견지하였다. 남달리 불우하였던 생애를 군자의 도로 지켜가고자 하였다.
이인로(李仁老)를 비롯한 죽림고회(竹林高會) 벗들과는 시와 술로 서로 즐기며 현실에 대한 불만과 탄식을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큰 포부를 문학을 통하여 피력하였다.
임춘의 시는 강한 산문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거의 그의 생애의 즉물적 기술이라 할 만큼 자신의 현실적 관심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가전체소설인 「국순전(麴醇傳)」 · 「공방전(孔方傳)」은 신하가 취하여야 할 도리에 대한 입언(立言)이면서 당세의 비리를 비유적으로 비판한 의인체 작품이다.
임춘의 서(書) · 계(啓) · 서(序) · 기 등은 안분지기(安分知機) · 가일(可逸)의 경지를 그려내고 있다. 「장검행(杖劒行)」을 비롯한 장편시들은 불우한 그의 인생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와 비분의 토로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강렬한 현실지향성이 그의 문학의 특징이다. 그리고 그의 문학은 투철한 자아인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상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춘은 예천의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되었다.
문집인 『서하선생집』은 그가 죽은 뒤 지우(知友) 이인로에 의하여 엮어진 유고집으로 6권으로 편찬되었다. 『동문선』 ·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여러 편의 시문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