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에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부(賦). ≪동문선≫ 권1에 실려 있다. 공자를 뭇새의 으뜸인 봉황에 비유하였다. 그의 덕행을 찬양하는 한편 그를 배우고자 하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중니봉부>는 서두부에서 공자와 봉황의 같은 점을 읊고 있다. “공자는 인간의 걸출이요, 봉황은 새의 왕이다. 그 이름은 약간 다를 망정 그 덕은 비슷하다.”라고 하였다. 봉황은 한 시대의 상서로운 칭호를 가지고, 공자는 백세(百世)의 스승이 된 성인이라 하여 공자와 봉황을 동일시하였다.
<중니봉부>의 본론부에서는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외형적 모습 때문이 아니라 지혜가 서로 합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공자가 위대한 것은 그의 형상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그런것이 아니고 내면의 덕 때문이라는 말이다.
부귀를 탐하지 않고 구차하게 벼슬하려 들지 않는 높은 덕의(德義)와 깨끗한 위의(威儀)가 공자를 위대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쇠한 주(周)나라의 70제후들은 소리개·부엉이들처럼 마침내 봉을 비웃었다. 그러나 궐리(闕里 : 공자가 살던 마을)의 3,000제자들은 참새들처럼 따랐다.”고 하였다.
부국강병 또는 눈앞의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던 제후들에게 버림을 받고, 인간의 내면적 삶을 추구하던 제자들에게 추앙받았던 사실을 대비적으로 읊은 것이다.
<중니봉부>의 결미부에서는 자신은 뛰어난 문장솜씨를 물려받아 어려서 장구(章句)의 수식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장년 이후부터는 공자의 학문과 풍도를 흠모하여 그 유풍을 찬양하며 배우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문부(文賦)의 형식으로 지은 <중니봉부>는 우리 나라 최초의 부라는 점에서 우선 문학사적 의의를 가진다. 내용면에서도 당시의 문단을 대표하는 작자의 문학관 내지는 학문관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문장보다는 경학에 비중을 둠으로써 이전의 수식 위주의 문풍이 사상적 내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