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양(漢陽). 초명은 조우(趙祐). 쌍성총관(雙城摠管) 조휘(趙暉)의 손자이다.
대대로 용진(龍津)에 살았는데, 고려에 귀부하여 충숙왕을 섬겼다.
당시 고려의 이민(吏民)이 자주 여진으로 도망하므로 여러 번 해양(海陽: 길주)에 파견되어 도민(逃民)을 쇄환하였고 이 공으로 감문위낭장(監門衛郎將)이 되고, 이어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에 제수되었다.
충숙왕 사후 용진에 퇴거하여 있던 중 공민왕이 1356년에 원에 빼앗겼던 쌍성의 수복을 도모하자, 아들 조인벽(趙仁璧)을 보내 쌍성인을 효유하는 등 동북면병마사 유인우(柳仁雨)가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적극 협력하여 쌍성탈환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공으로 예빈경(禮賓卿)에 임명되어 다시 관직에 나가게 되고, 이듬해에는 태복경(太僕卿)이 되었다. 쌍성탈환 당시 총관이었던 조소생(趙小生)이 조카였기 때문에 여진지역으로 도망한 자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파견되기도 하였으나 성과는 없었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이 고려를 침구하자 안우(安祐)의 휘하에서 지병마사로 종군하여 적을 격퇴하였으며, 이듬해 사농시판사(司農寺判事)를 거쳐 1361년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었다.
이 해 홍건적의 재침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남행하게 되자 목인길(睦仁吉)과 함께 복주(福州: 경상북도 안동)의 군사를 나누어 행궁숙위의 책임을 맡았다.
홍건적 격퇴의 공으로 1등공신에 녹명되었으며, 해주목사·예의판서(禮儀判書)·검교밀직부사(檢校密直副使) 등을 지내고, 1372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지고 수년 후 용진에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