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도교
개념
생태계 일반을 관통하는 우주적 생명력을 가리키는 종교용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생태계 일반을 관통하는 우주적 생명력을 가리키는 종교용어.
내용

기의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이 농경사회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사서인 『설문해자(設文解字)』는 기를 운기(雲氣), 즉 구름이라 풀고 있는데, 은·주시대 이전부터 기는 바람이나 구름을 포함한 기상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기상과 계절의 변화를 나타내는 천기(天氣)와 땅의 기운인 지기(地氣)가 결합하여 곡물이 생장한다. 동물은 식물의 생명력을 소화·흡수의 과정을 거쳐 활동력으로 삼는다고 고대인들은 생각했다. 기는 이렇게 해서 생태계 일반을 두루 관통하고 있는 우주적 생명력을 뜻하게 되었다.

인간의 생명 역시 기의 흐름이었다. 그것이 피의 순환과 연관된다고 보아 혈기(血氣)라 했고, 호흡이 그 관건이라 보아 기식(氣息)이라 했다. 내적 생명의 상태는 자연히 밖으로 드러난다 해서 기색(氣色)·기분(氣分)·기품(氣品)이라는 표현이 있게 되었다. 글에서는 문기(文氣), 글씨에서는 서기(書氣)가 문제되는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질병은 체내에 있는 기가 순조롭게 돌지 않을 때 생기는 현상이었다. 한의학에서는 치료를 엉킨 기, 막힌 맥(脈)을 소통시키는 행위로 이해한다. 한의학의 치료와 결합한 도교는 기를 잘 기르고 보존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자면 재산이나 명예 따위의 세속적 욕망에 흔들리지 않고 생리적 필요에 충실해야 한다면서 연금술과 호흡법을 개발시켰다.

그런데 공자 이래 유가(儒家)의 생각은 달랐다. 생리적 욕구인 기는 오히려 다스리고 제어해야 할 대상이었다. 공자는 “혈기를 조심하라.”고 했고 순자(荀子)는 “인간과 동식물에 공통된 힘은 기이나,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이성으로 기를 제어해야 한다.”고 말했다.

맹자는 “의지가 굳으면 기를 움직일 수 있다.”고 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또 한편 순수한 감정과 도의적 자긍심을 야기(夜氣)·호연지기(浩然之氣)로 명명함으로써 논란을 예비했다.

수·당시대를 거치면서 불교와 도교가 치밀한 세계관과 인간관을 기반으로 사상계를 풍미하게 되자, 유학은 예의범절을 익히고 가르치는 수준을 넘어 포괄적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정비하여야 했다.

송대에 이르러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 그리고 장재(張載)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우주와 인간을 관통하는 이기철학(理氣哲學)의 체계를 세운 사람이 바로 주희(朱熹)였다. 우리 나라에서 전개된 기의 사상을 살펴보기에 앞서 그의 이기론을 약술할 필요가 있다.

주희에 의하여 기는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자연세계는 물론, 인간의 감정·의지·사유까지 포괄적 기의 한 계기로 이해되었다. 기는 본래 유동적·활동적이어서 원초의 혼일적(渾一的) 기는 음양(陰陽)으로 자체 분화되고, 그것은 다시 오행(五行)으로 갈라진다. 모든 사물의 생성과 변화는 음양오행이 서로 갈등, 조화하는 과정으로 풀이된다.

기의 이 같은 운동과 변화에는 일정한 질서가 있다. 주희는 이 정합적 질서에 이(理)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우주를 주재하는 원리인 이는 흠없이 선하고 완전하기에 세계는 본래 조화롭고 질서가 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도식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와 의지로서의 기에도 그럴 만한 까닭이 있으니, 인간의 ‘표현’ 전체를 전면적으로 수긍하는 것이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길이다.

그렇지만 인간사의 불합리와 모순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실현해야 할 이념으로 설정한 다음, 타고난 기질(氣質)을 그에 비추어 제재, 간섭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자학의 표어는 ‘성즉리(性卽理)’이다. 기가 아니라 이가 인간과 만물의 본성을 구성한다.

이의 구체적 내용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이니 그 실현에 힘쓰라고 권했다. 명백한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기의 자연적 변화에서 나타나는 질서인 이’와 ‘도덕적 요청으로서의 이’는 같은 동전의 양면임을 주장하였다.

이는 소이연(所以然)이면서 소당연(所當然)이라는 것이다. 이 설득에 성공했기에 주자학은 오랫동안 관학(官學)으로서 강력한 사회통제의 이념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명청사상사(明淸思想史)는 주희가 무리하게 연결시킨 고리를 풀면서 인간성의 긍정, 개성의 발현을 주창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물론 이보다 기를 앞세우는 ‘기의 사상’으로 흘러갔다.

요컨대, 주희에 있어서 기(또는 기질)는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띠고 있다. 하나는, 주어진 신체를 통해 우주적 역사(役事)에 동참하는 나름의 개성으로서의 기, 그리고 또 하나는 도덕적 이념인 이의 실현을 가리고 방해하는 생리적 욕구로서의 기이다.

주희는 실제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두 가지로 모호하게 쓰고 있다. 주희 이후의 명청기학(明淸氣學), 그리고 우리 나라의 이기철학은 주희가 남긴 애매함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예술이나 한의학, 또는 일상어법에서 기는 널리 쓰이고 있었지만, 세계관과 인간관의 기본 개념틀로서 논의되고 발전된 것은 송대 이기론이 전래된 이후의 일이다.

(1) 정도전(鄭道傳)

비대한 사원경제와 권신(權臣)의 횡포를 막으면서 체제의 전면적 개편을 주도한 정도전은, 기를 정치·사회적 현실로 보고 이[道]를 정비된 질서로 이해하였다.

그는 “기에 청탁과 성쇠의 구분이 있는 까닭에 세도의 치란과 인재의 현우가 있다.”고 하면서도 난세는 필연적으로 극복된다는 개혁가다운 믿음을 지녔다.

그는 또 불교와 도교를 반사회적 집단으로 규정하였다. 가족을 돌보지 않고 개인의 심성 수양에만 힘쓰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덕적 실천이나 의무에 대한 자각 없이 양기(養氣)를 통하여 육체적 상태를 조절하고 수명을 연장시키려는 도가의 태도는 올바르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2) 서경덕(徐敬德)

정도전은 기의 일반적 용법에 입각해서 단편적 논의에 그쳤으나, 서경덕은 최초로 기를 철학의 중심주제로 삼았다. 우주에는 기가 꽉 들어차 있다. 허공은 무(無)가 아니라 유(有)인 태허(太虛)이다.

바람은 부채 속에 있지 않은데, 그렇다고 바람을 무라 하기에는 뺨에 와 부딪치는 서늘함이 너무나 생생하다. 이 체험을 통해 서경덕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실재하는 기의 존재를 확신했다.

기는 동정(動靜)·합벽(闔闢)이라는 운동과 변화의 속성을 자체 내에 가지고 있다. 존재자는 기의 모임[凝聚]이다. 정신이나 지각 같은 고도의 정신능력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이나 소멸은 모였던 기가 풀려 본래의 태허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기에 기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생성과 변이·소멸에는 일정한 질서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이’이다.

이러한 이는 기를 제재, 간섭할 수 없다. 이른바 이가 주재(主宰)한다는 말은 밖에서 기를 명령하고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다. 세계는 조화롭고 완미(完美)한 체계이니 인간은 욕구의 주체로 세계와 대립할 것이 아니라 포괄적 기의 순환에 동참하라고 권하였다. 그것이 ‘머무름[止止]’의 철학이다. 자신을 잊고 대상을 대상으로 놓아줌으로써 인간과 세계는 온전해진다고 본 것이다.

(3) 이황(李滉)

서경덕은 자아의 의지를 떠나 세계를 관조했기에 기를 신뢰할 수 있었지만, 이황은 그럴 수 없었다. 이황은 질서잡힌 자연보다 욕구와 의지로서의 기에 우선적으로 주목했다.

서경덕처럼 기를 낙관해 버리면 자칫 인간의 사악함까지 모두 긍정해야 하는 위험한 사태, 즉 이황의 표현에 의하면 인욕(人欲)을 천리(天理)로 인정하는 사태에 떨어지고 만다.

기는 제어, 통섭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자면 기보다 더 크고 강한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황은 기에 대한 이의 우위를 역설하였다. 이는 기의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 기를 명령할 수 있는 독립성을 지닌다.

그래야만 사회의 질서가 바로잡힐 수 있다. 그가 어찌하여 기대승(奇大升)에 맞서 “이기는 분리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지 이해할 만하다.

사단(四端)은 이가 발(發)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가 발한 것으로 서로 넘나들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이기의 통체구조에 입각한 주희의 사유와 어긋난다. 기대승이 그 점을 따지고 들자, 이황은 “사단은 이가 발해서 기가 따른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고 이가 탄 것”이라는 절충안을 내놓기는 하였으나, 본래 생각을 굽히지는 않았다.

(4) 이이(李珥)

이이는 이황처럼 이기를 둘로 나누는 태도는 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소치라 비판하면서 “이기가 한몸”이라고 주장하였다. 기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현실이라면, 이는 현실의 원리라는 생각에 충실했다.

그렇다고 이이가 서경덕의 생각에 완전히 동의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깨친 바가 있는 사람이면서도 서경덕은 기를 이로 인식한 결정적인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다. 현실을 비판이나 매개 없이 그대로 용인해서는 안된다는 뜻인데, 서경덕의 학설은 그러한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이기가 하나임을 관철시키면서 현실의 다양한 모순과 갈등을 설명하자면 기를 그렇게 만든 이에 잘못이 있다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이에도 선악이 있다. 이는 절대선인데 거기에 악이 섞여 있다는 이이의 발언은 우주의 이법을 낙관하는 성리학의 자연주의와 어긋난다. 이이는 이 의혹을 이일분수론(理一分殊論)으로 해결했다.

이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으니 이일분수라면 기일분수(氣一分殊)도 같은 진리이다. 본연의 이와 한몸인 본연지기(本然之氣)는 흠이 없는데 기가 분화, 파생, 교섭하는 과정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사태도 생길 수 있다. 이것이 현실의 악(惡)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사태, 즉 이이의 표현으로는 기의 넘치고 모자람[過不及]은 인간의 노력으로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그러한 인간의 고유한 능력도 그의 체계에 의하면 기의 몫이다. 본연의 기를 가리는 것도 기요, 그것을 회복하는 힘도 기이다.

이이에게서 이는 철저히 기 운동의 내적 원리로만 남아 있다.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이발(理發)과 기발(氣發)로 나누었지만 이이는 짐작하듯 기발만 인정했다. 감정·의지의 표현에 있어 양자간의 구조적 차이는 없다.

이황처럼 사단을 통해 발현되는 인의예지가 일방적으로 인간의 자연적 경향성을 다스려야 한다고도 주장하지 않았다. 그보다 기의 상호연관성을 살피고 그 적부(適否)를 판단하는 사유[意]의 기능을 부각시켰다.

이이는 이렇게 현실적 기의 동향과 추이라는 구체성에 입각했기에 남다른 현실진단능력을 키울 수 있었고 정치의 개선방안을 적극적으로 내놓을 수 있었다.

(5) 임성주(任聖周)

이황과 이이의 의견대립이 나중에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를 낳는다. 원인은 결국 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다른 데서, 그리고 이것과 연관된 이의 해석이 달라진 데서 온 것이었다.

논쟁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기의 우선·우위를 말하는 주기론(主氣論)보다 이의 절대성·교조성을 강조하는 도학파(道學派)가 여전히 위세를 떨쳤다.

조선 후기에 농업경제가 개편되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변모해 가는 새로운 사회 분위기는, 신분제도에 기반한 사회통제와 규범적 질서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기를 중시하는 사상이 그 같은 경향, 특히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의 북학파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임성주는 북학파 내부의 인물은 아니지만 북학파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임성주는 우주를 거대한 생명력의 흐름이라고 보았다. 각각의 존재는 주어진 신체를 바탕으로 우주적 생명을 나름대로 구현하는 개성이다. 그것이 기이고 생의(生意)이다.

그러므로 기에 맑고 탁함[淸濁], 순수하고 잡됨[粹駁]의 구별이나 가치평가는 무의미하다. 잉어의 뱃속에도 바닷물이요, 방어의 뱃속에도 바닷물이듯 그것이 생명인 한, 가치의 우열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질 밖의 초월적 이념이 본성이라는 생각에 반대하면서, 기질이 그대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했다. 만물의 본성은 각각의 형체에 상응하는 생의의 발현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현실태와 이념태의 구분을 없애버렸다.

기질, 다시 말해서 식색(食色)을 포함한 의지와 욕구, 개성적인 삶은 충분히 발현되어야 한다. 기질은 더 이상 이의 실현을 가리고 방해하는 부정적 요소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이황과도 달랐고, 타고난 자연성을 개성으로 용인하자고 권유하는 점에서 실천과 개혁을 강조한 이이와도 달랐다.

인간과 세계를 온통 낙관한 그는 현실에 존재하는 악은 다만 맑은 물이 진흙에 흐려지듯 일시적인 ‘찌꺼기현상[渣滓現象]’일 따름이니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6) 정약용(丁若鏞)

정약용은 민중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고조되던 개성의 해방을 위태롭게 여겼다. 대내적 무질서, 대외적 위기가 심각한 당대의 현실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기규제라고 생각했다.

모든 만물이 기로 형성되어 있고 그 기에 내재하는 원리가 동일한 이라면 인간과 사물존재의 구분이 모호해짐은 물론, 세계를 턱없이 낙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인간은 주어진 현실을 부단히 개선, 변용, 창조하는 주체라는 인식에서 정약용의 사상은 출발한다. ‘이기가 한몸’이라는 세계관은 그러므로 폐기되어야 한다. 전대의 사상은 천지만물을 일리(一理)로 귀착시켜 대소·주객을 구분하지 않는 잘못을 저질렀다.

물(物)은 객관성·독립성·자주성을 가진다. 정약용은 세계의 보편적 원질이나 우주적 생명으로서의 기를 인간의 생리적 욕구로 환원시켜 버렸다.

식색안일(食色安逸)이 기의 정체라면서 성리학이 발전시킨 개념 이전으로 돌아갔다. 욕구[氣]는 타인과의 갈등과 대립의 원천이다. 자신에 집착하는 점착성(粘着性)을 극복하여 타인에의 관심과 사랑을 넓혀가는 것이 사람다운 노릇이다. 그것이 인(仁)이다. 이러한 극복은 기의 자연성을 넘어서는 초극이며 비약이다.

정약용은 그 초월에의 의지[超形之心]야말로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선하며 그럴 수 있는 능력은 인간만이, 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는데, 이것(自主之權)이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육신[氣]을 다스리는 일은 인간성의 억압이 아니라 그것의 진정한 실현이라고 하였다.

(7) 최한기(崔漢綺)

같은 실학자이면서도 최한기는 정약용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기를 성리학 이전으로 되돌리지 않고, 우주와 인간의 전 체계를 해명하는 기본틀로 삼았다. 우주는 기, 그것도 신기(神氣)의 움직임이다. 끊임없이 살아 있는 활동부정(活動不定)의 생명체임을 강조하고자 기에 ‘신(神)’이라는 접두어를 붙였다.

신기는 예외없이 형체를 빌려 드러나므로 존재는 각자 나름의 가치와 특성을 지닌다. 여기까지는 임성주의 생각과 유사하다. 그런데 사람의 신기만큼은 본래 아무런 경험내용도 확보하지 않은 백지상태였다가 사물을 지각, 경험하는 과정을 거쳐 점차 자라나고 폭이 커지는 시간성을 지닌다.

인간의 신기인 마음은 일차적으로 저것을 들어 이것과 비교하고 이것을 들어 저것을 징험(徵驗)하는 지각·인식·판단의 기능이다. 인간은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고 내면화시킨다. 이치와 원리의 탐구는 가시적이고 경험적인 것에서 출발해야 허탄(虛誕)에 떨어지지 않고 적실성·유용성을 가진다.

객관의 기와 주관의 기는 이렇게 만난다. 인간본성의 탐구에 있어서도 무턱대고 인의예지가 성이라고 규정할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실상을 면밀히 검토하고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이 타고난 천기가 곧 성이며, 이가 아니라 기가 인간의 본성이라 했다. 최한기는 이렇게 성즉리의 성리학 체계와 결별했다.

개체는 나름의 욕구와 개성을 표현, 실현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우선 인정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충돌과 갈등이 없을 수 없다. 갈등은 생명의 본질이요 기의 당연한 귀결이다. 최한기의 사상체계는 이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모험적 시도이다. 최한기는 그것을 변통(變通)이라 불렀다.

이때 미리 설정된 규범이나 사회적 관행을 강요하는 것은 적실한 해결책이 아니다. 인간의 기미와 사회관계의 조리에 대한 경험과 추측이 해결의 실마리가 되어야 한다. 신기는 욕구의 충족이 이기적으로 수행될 경우 생기는 공동체의 곤경을 깨닫게끔 되어 있다. 이 사회성에의 자각을 바탕으로 갈등과 긴장이 해소된 바람직한 공동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현실의 기는 늘 유동하고 변하는 까닭에 변통을 위해 과거에 마련되었던 잣대는 부단히 개선, 변혁되어야 한다. 공자가 공자다웠던 것도 고금을 참작하고 질문(質文)을 손익(損益)한 현재적 사유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세계의 의미, 인간사회의 변화를 이해하고 대동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은 완결될 수 없는 영원의 과제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서구 열강의 침입과 민족항일기를 지나 광복을 맞은 지 40여 년이 지나도록 기의 사유는 끊겨 있었다. 전통은 불행한 과거의 유산이어서 청산해야 할 짐으로 생각하였기에, 기는 사유의 도구로 쓰이지 못하고 대신 서구의 학문과 조류가 오랫동안 이 땅에서 행세하였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실체와 현상’,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에 물들어 있는 서구적 방법론의 한계를 절감하고, 인간과 세계, 인간과 인간의 역동적 상호교섭을 포괄적으로 해명하고자, 기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참고문헌

『여유당전서』
『명남루총서(明南樓叢書)』
『한국유학사』(배종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4)
『한국유학자료집성』 상·중·하(배종호 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0)
『中國哲學史』(勞思光, 臺灣 三民書局, 1981)
『氣の思想』(小野澤精一等 編, 東京大學 出版會, 1978)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