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시는 경기도 중앙에 위치한 시이다.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서북부에는 관악산이 서울과 안양시와 경계를 이루고, 동남부는 청계산과 옥녀봉이 서울과 성남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본래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에 편입되었다가 신라 경덕왕 때에 율진군으로 개칭되었다. 940년에 과주(果州)라고 명명되고, 1413년에 지금의 명칭인 과천현이 되었다. 서울의 남부 관문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문물의 왕래가 활발하였는데 국도 47호선의 확장과 전철의 개통으로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시민을 위한 종합문화공간으로 서울대공원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있다.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한 이 지역은 서북부와 동남부는 500m 이상의 높은 산지가 병풍처럼 솟아 있고 북부에는 100∼300m의 구릉이, 남부에는 100m급의 곡저평야가 길게 펼쳐져 있다.
서북부에는 관악산(冠嶽山, 631m)이 서울 · 안양시와 경계를 이루고, 동남부의 청계산(淸溪山, 582m)과 옥녀봉(玉女峰, 360m)은 서울 · 성남시와, 남쪽의 응봉(鷹峰, 349m)은 의왕시와 경계를 이룬다.
동남부 산지에서 흐르는 지천이 과천저수지를 이루며, 이 저수지의 물은 동북으로 흘러 양재천(良才川)에 합류한 다음 탄천으로 흐른다. 이 저수지와 양재천은 주변 농경지의 관개용수로 이용된다. 관악산에서 흐르는 하천은 별양동 · 부림동에서 양재천에 합류한다.
서울에 인접한 이곳은 분지지역으로 서울시와 기온차가 크다. 연평균기온은 11.30℃, 1월 평균기온은 -6.6℃, 8월 평균기온은 26.4℃로 연기온차가 30℃를 넘는다. 연강수량은 1,491mm이다.
신도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문화유적을 조사하지 않아 이곳에서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확인된 적은 없다. 그러나 문원동에서 민무늬토기와 돌도끼가 출토되었고, 인접한 안양의 평촌 신도시에서는 고인돌이 발굴되어 이 시에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본래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장수왕이 남정해 고구려의 영토가 면서 율목군(栗木郡) 또는 동사힐(冬斯肸)이라 불렸다. 757년(경덕왕 16) 율진군(栗津郡)으로 개칭하고, 곡양(穀壤) · 공암(孔巖) · 소성(邵城)의 3개 현을 영현으로 삼았다.
940년(태조 23)에 과주(果州)로 개칭되고, 990년(성종 9)부터는 부림(富林, 또는 富安)으로 별칭되기도 하였다. 995년 10도제 실시에 따라 기내도(畿內道)에 예속되었으며, 현종 때 5도제 실시로 양광도(楊廣道)에 예속되었다가, 1018년 광주목(廣州牧)에 소속되어 감무를 두었다.
1284년(충렬왕 10) 용산처(龍山處)가 부원현(富原縣)으로 승격되어 과주에서 분리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 경기도가 좌 · 우도로 분리될 때 경기좌도에 예속되었다.
1402년(태종 2) 8도제 실시로 경기도에 예속되고, 1413년 지금의 명칭인 과천현이 되었으며 현감을 두었다. 1414년 금천현과 병합, 금과현(衿果縣)으로 불리다가 곧 폐지되었다. 세조 때 진관체제 성립에 따라 광주진관(廣州鎭管)에 소속되었으며, 현감이 절제도위(節制都尉)를 겸임하였다.
1895년(고종 32) 과천군으로 승격, 인천부(仁川府)에 속했다가 1896년 경기도의 4등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산군 · 시흥군 · 과천군이 시흥군에 통합되어, 과천군의 관할구역 중 노량진 · 본동 · 흑석 · 동작동은 북면, 우안 · 양재리 등 8개 리는 신동면, 안양리 등 4개 리는 서이면, 관문 · 문원 · 갈현 · 하계 · 막계리는 과천면으로 개편되어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1978년 과천 신도시계획 시설에 따른 기준지가대상지역으로 결정, 공고된 뒤 도시개발계획 확정과 도시계획건설 결정고시가 뒤따랐다. 1979년 경기도 과천지구지원사업소가 설치되어 신도시 건설에 따른 업무를 추진하다가, 1982년 경기도 과천지구출장소로 승격되고 북부지소와 남부지소를 설치해 시행정을 관장하였다.
1986년 1월 과천시로 승격되어 정부과천청사 · 경기도립과천도서관 · 국사편찬위원회 · 국립현대미술관 · 서울대공원 · 서울랜드 · 청소년야영장 등 주요 기관을 수용하면서, 쾌적한 전원도시의 면모를 갖추며 행정도시의 기능을 담당하는 현대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관악산 연주봉(戀主峰)에 자연암벽으로 된 연주대(경기도 기념물, 1973년 지정)가 있고, 조선 정조가 화산릉(花山陵)에 참배하러 행차했을 때 피로한 몸을 쉬고자 잠시 들렀던 온온사가 관문동에 있는데, 편액(篇額)이 정조의 친필이다. 온온사는 1980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중앙동의 연주암에는 연주암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1980년 지정)과 효령대군의 얼이 서린 호국도량이었던 관악사지(경기도 기념물, 2003년 지정) · 과천 육봉 일명사지(경기도 기념물, 2003년 지정)가 있고, 갈현동에는 보광사 목조여래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996년 지정), 문원동에는 시흥 문원리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 1983년 지정)과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1989년 지정)이 있다.
이 밖에도 연주암의 금륜보전(金輪寶殿)과 응진전나한탱(應眞殿羅漢幀) · 약사여래입상 · 대웅전 등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유교 유산으로는 중앙동에 과천향교(경기도 문화재자, 1983년 지정)가 있다.
유물로는 중앙동의 연주암에 효령대군영정(경기도 유형문화재, 1978년 지정)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인 조선방역지도(국보, 1989년 지정)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관문동에는 부림헌(富林軒)이 있던 유지가 있다.
예로부터 수도 서울의 남부 관문에 해당하는 과천시는 문물의 왕래가 활발해 일찍부터 교육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398년(태조 7)에 창건한 과천향교가 있는데, 무학(無學)의 수제자로 있던 열(悅)이 건립했다고 한다. 중앙동에 있는 이 향교는 1997년에 시흥향교에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일찍이 명륜당에는 명륜학교(明倫學校)를 세워 신종묵(愼宗默)이 현대식 학교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뒤 1908년 광명학교(光明學校)가 설립되었으며, 1910년 이 두 학교가 통합되어 쌍명학교(雙明學校)로 되면서 과천지역 교육의 요람으로 성장해 왔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4개교,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4개교가 있다. 이 밖에 도립도서관과 국사편찬위원회가 있다. 청사 이전에 따른 국사관이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개관 등으로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민속놀이는 정조대왕(正祖大王)의 능행(陵行)을 위로하고 그 행렬을 환영하는 데서 유래했다는 무동답교놀이를 비롯해, 주로 정월대보름에 행해지는 놀이가 많이 전승되고 있다.
무동답교놀이는 한 해의 액운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고자 다리를 밟았던 답교놀이와 융릉(隆陵)에 능행을 하던 정조대왕을 위로하고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무동극(舞童劇)인 무동놀이가 합쳐진 놀이 형태이다.
이 놀이는 다리에서 소지(燒紙: 신령 앞에서 비는 뜻으로 종이를 불살라 공중으로 올리는 일)를 올린 뒤 능개가락에 맞춰 애기무동을 밑무동(壯丁) 위에 올리고는 해학적 표현을 보여 주는 무동극놀이를 하면서 주민들과 호흡을 같이하는 것이다.
놀이꾼의 구성은 무동(舞童) 역으로 소승(小僧), 별감(別監), 나장(羅將), 팥복, 여무동(女舞童) 둘 등 여섯이 있어서 밑무동의 어깨 위에서 춤을 추며 놀이를 하고 촌장과 왜장녀 및 주민 다수가 참여한다.
악대 편성은 호적 · 장고 · 북 · 상쇠 · 태평소 · 소라 · 징 각 1쌍과 소고 10쌍으로 이루어진다. 놀이 순서는 ① 당나무고사 ② 지신밟고 우물고사 ③ 무동놀이 행진 ④ 지신밟고 다리고사 ⑤ 무동마당놀이 ⑥ 선소리 ⑦ 무동다리놀이 ⑧ 뒤풀이(대동놀이) 순으로 진행된다.
이런 무동답교놀이와 함께 정월대보름의 민속놀이로 즐기는 놀이로는 지신밟기와 줄다리기 · 달맞이 등이 있다. 지신밟기는 정월 14∼15일에 두레패들이 가가호호를 돌며 그 해 농사의 풍년과 집안의 평안을 비는 것으로, 마을기금을 마련하는 동시에 보름놀이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보름날 낮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줄다리기가 열리는데, 한수(漢水) 이북과 한수 이남으로 편을 나누어 대결을 벌인다. 이 때 한수 이남이 이겨야 비가 많이 내려 풍년이 든다고 여겼으며, 줄다리기를 했던 줄은 각 마을에서 가져가 잘게 썰어 논밭에 뿌려 풍년을 기원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짚불놀이를 하는데, 나이 수만큼 짚 뭉치를 엮어 불을 붙여 들고는 보름달을 행해 절을 하면서 ‘달님 절합니다’라고 읊조린 뒤 마음속으로 소원을 비는 달맞이놀이를 했다.
이 외에 일반적인 놀이로는 연날리기 · 윷놀이 · 씨름 · 호미씻이 · 낫치기 · 갈퀴치기 등이 있으며, 부녀 놀이로는 오늘날의 수건돌리기 방식으로 종지를 돌리면서 놀이를 하던 종지돌리기와 그네뛰기 · 널뛰기 등이 있었다.
아이들 놀이로는 남자아이들이 하는 것으로 진뺏기 · 기마전 · 말타기 · 닭싸움 · 비석치기 · 자치기 · 고누 · 못치기 · 풀싸움 · 천렵 등이 있었으며, 여자아이들은 공기놀이 · 실뜨기 · 다리세기 · 땅뺏기 · 앵금치기 등의 놀이를 즐겼다.
동제는 본래 한강 이남의 화랭이패 세습무(世襲巫)들이 하는 도당굿 형태였다.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과천시 관내에 세습무들이 살았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지금의 사당동 사거리 근처의 송방들에 당집이 있었으며, 큰 소를 잡아 남태령에서 도당굿을 크게 벌였다고 한다.
이 도당굿을 집행하던 화랭이패들은 갈현동 찬우들에 살던 세습무인 임상문 일가로, 그들이 줄을 타며 축제 분위기를 돋우고 굿을 주도했다고 한다. 도당굿 때는 동네 양쪽 동구에 장승을 한 쌍씩 세웠는데, 그 한쪽이 지금의 채석장인 승방들이다. 굿은 음력 10월 3일 아침부터 시작해 밤을 꼬박 새워 진행했으며, 구경꾼들에게는 밤참으로 떡국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도당굿의 경비는 마을사람들이 쌀을 추렴해 마련하고 제물은 마을사람들이 함께 정성스럽게 장만했으며, 도당굿 당일에는 동네 사람들 전체가 새 옷을 갈아입고 참여했다는 것으로 보아 마을 축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마을굿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세습무가 집행하던 도당굿은 사라졌고,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자연적 환경이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는 청계산 서쪽 지역의 몇몇 마을을 중심으로 유교식 동제가 행해지고 있을 뿐이다.
비록 마을굿의 형태는 사라졌지만 현재까지도 비교적 전승이 잘 되고 있는 동제로는 하리(下里: 지금의 과천동)의 도당제를 들 수 있다. 이 도당제는 마을수호신인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를 섬기며, 유교식 제의로 치러진다.
제일은 음력 10월 초하루이고, 마을사람 중 생기복덕하고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당주를 뽑아 제물을 준비하게 했으며, 제관 · 대축 · 소임 등을 선정해 대소사를 맡아보게 하였다.
도당제의 경비는 마을사람들에게 쌀을 추렴해 마련했으나 지금은 돈으로 걷고, 동사무소의 지원과 마을 유지의 찬조금으로 충당된다. 제는 산신제와 도당제 순으로 진행된다.
제일 날 오후 6시경 제관 · 대축 등이 산에 올라가 제물을 진설하고 산신에게 제를 올린 후, 마을로 내려와 신체인 느티나무 고목에서 삼헌관(三獻官)이 차례로 절을 하며 축문을 읽는 형태로 진행된다. 그리고 마을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비는 대동소지와 각 가정을 위한 개인소지가 있은 뒤 음복을 하고는 도당제를 끝낸다.
과천에서는 이런 하리 당제 이외에도 주암동 · 문원동 · 갈현동 등에서 지금도 제를 지내고 있는데, 이 중 몇몇 곳은 서낭목을 없애거나 동제를 중단하자 마을에 변고가 생기고 젊은 사람들이 횡액으로 죽어 다시금 동제를 지내게 된 경우이다.
망경대(望景臺)에 얽힌 홍수 창조신화적 성격의 설화를 비롯해 지명의 유래를 설명하는 전설 및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전설이 많이 전승되고 있으며, 아울러 전국적인 분포양상을 보이는 민담도 적지 않게 채록되어 있다.
「망경대이야기」는 천지개벽시 관악산 꼭대기만 빼고 이 세상이 온통 물에 잠겨 있었는데, 조물주가 여기에 배를 대고는 주변의 훌륭한 돌들을 모아 청계산 정상에 절경을 만들어 이것을 만경대(萬景臺)라고 이름 지었는데, 뒤에 고려 유신 조윤(趙胤)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고려의 서울이었던 개성을 바라보았다고 해 망경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고 전한다.
역사적 인물과 결부된 지명전설로는 정조(正祖)의 능행과 관련된 「남태령고개」와 강감찬의 출생을 담고 있는 「망령골」, 연산군의 악행으로 자살한 여인의 이야기인 「관악산의 왕후묘(王后墓)」 등이 있다.
「남태령고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지명전설이다. 정조가 수원으로 능행을 하던 중 여우고개라 불리는 데에 이르러 그 곳에 사는 촌로(村老)에게 고개의 이름을 묻자 ‘남태령’이라 거짓 이름을 대었다.
그 고개 이름을 알고 있던 정조가 노해 거짓으로 이름을 댄 까닭을 추궁하자, ‘여우고개’라는 이름이 너무 상스러워 감히 아뢸 수 없어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중 맨 처음 있는 큰 고개라는 뜻으로 그렇게 답했다고 하였다. 그러자 정조가 촌로를 오히려 가상히 여겨 주지(周知)라는 벼슬을 주었고 이후로는 남태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망령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사내가 장에 다녀오던 중 어떤 고개를 지나다가 소복한 아름다운 처녀를 만나 하룻밤 인연을 맺고는 헤어졌다. 일 년 뒤 청년이 다시 그 고개를 지나는데 소복한 처녀가 다시 나타나 관악산 모처의 바위에 가서 아이를 데려다 기르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소복한 여인이 말한 곳에 가 보니 정말 사내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는데, 그 아이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다. 그리고 그 골짜기는 여인의 망령이 나타났던 골짜기라 해 망령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관악산 왕후묘」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다. 연산군이 관악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빨래하던 처녀를 발견하고는 강제로 그녀의 집에서 잠자리를 같이 했다. 하지만 처녀에게는 이미 정혼자가 있었고 이런 상처를 안은 채 이들은 혼인을 했는데, 연산군은 관악산에 사냥을 올 때면 그녀를 찾아 잠자리를 같이 하고는 환궁하곤 하였다.
그녀는 결국 남편에 대한 죄책감에 자결을 했고, 남편은 아내의 시체를 큰 돌 밑에 묻고는 자취를 감췄다. 그 뒤 연산군이 다시 그녀의 집에 들렀을 때 그녀가 자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무덤을 파서 시체를 확인하려 하였다.
그러자 허공에서, 지아비에 대한 사죄로 세상을 하직했으니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연산군은 놀라 무덤을 덮고 비석을 세워 단장하고는 왕후묘라고 이름 짓게 하였다.
이 외에 「세민황제본풀이」의 변형담이라 할 수 있는 「당태종이 저승 가서 겪은 이야기」와 「잃어버린 독태」형 설화에 해당하는 「돌멩이와 개구리의 우정」, 「금척(金尺)」형 설화인 「꿈을 잘 꾸어 조선, 중국의 부마가 된 시골머슴」 등 전국적으로 전승되는 민담도 많이 있다.
민요는 노동요 · 의식요 · 유희요 가운데 유희요만이 채록되지 않고 나머지 민요는 비교적 전통적 특징을 잘 보여 주는 편이다. 노동요 가운데 과천농요로 하나의 세트를 유지하는 것이 있다. 농요는 모심는소리와 논매는소리로 대별된다.
과천의 모심는소리는 하나에서 열까지 소리를 헤아리는 유형으로 전한다. 열소리라고 토착 명칭이 있다. 대체로 경기도 남부 지역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논매는소리는 앱러논매기 · 두벌논매기 · 세벌논매기 등에 두루 쓰이는 소리가 발달해 있다. 그런데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형식이 체계적으로 짜여져 있다.
과천 논매는소리의 가짓수는 다음과 같다. 긴소리 · 방아타령 · 쏴아소리 · 상사소리와 새 쫓는 소리인 우야훨훨 등으로 짜여진 문원동의 소리가 있으며, 다른 유형으로 사두소리 · 방아소리 · 몬둘소리 · 우야훨훨 등으로 짜여진 막계동의 소리가 있다. 문원동과 막계동에 전승되는 논매는소리를 통해 시의 농요가 매우 풍부하고도 토착적인 소리를 전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노동요 가운데 특별한 소리로, 소를 몰면서 부르는 소부르는 소리가 있다. 농사일에 반드시 소용되는 소리로 사람과 소의 교감을 소리로 하는 것인데, 다행스럽게도 이 소리가 전승되고 있다.
이 밖에 나무꾼이 나무를 하면서 부르는 신세타령도 전승된다. 또한 맞두레질을 하면서 물을 풀 때 하는 물푸는 소리도 전승된다.
의식요로서 비교적 고형을 유지하고 있는 소리는 상여소리와 달구소리이다. 상여소리와 달구소리는 경기도 남부의 토리를 그대로 따른다. 경기도 남부소리는 경기도 민요의 형식을 그대로 따른다. 민요는 유희요가 희박한 편이다. 반면에 노동요와 의례요는 풍부하게 전승되고 있지는 않지만, 비교적 경기도한강 이남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 준다.
산지가 전 토지의 2/3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많다. 토지의 16.2%가 경지이고 대지는 7.4%, 도로 용지는 4.6%에 불과하다. 331㏊의 경지 중 논은 22㏊, 밭은 309㏊이나 경지면적이 계속 감소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조질저수지 · 과천저수지가 있어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채소류로 상추 · 배추 · 무 · 고추 · 파 · 오이 · 토마토 등이 생산된다. 1980년대에는 복숭아 · 배 등의 과일 주산지였으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과수원이 주거지로 변해 과수의 생산이 점차 감소함에 따라 현재는 과실의 생산량이 500t 이하이다.
과실 이외에 화훼단지가 곳곳에 입지해 있는데, 이들 화훼단지에서는 서울의 양재동 꽃시장에 꽃을 대량으로 공급하고 있다. 이 밖에 소규모의 목축업이 발달해 있었으나 동물원 · 경마장의 입주 이후 감소하고 있다.
2008년 현재 농가 인구는 전체 인구의 2.9%인 2,024명이고, 위성도시이자 행정도시인 이곳에 제조업 인구는 거의 없어 전체 인구의 0.3%인 223명뿐이다. 주요 제조업으로 종이 · 인쇄 · 출판업이 활발하다.
시는 행정 기능, 원예작물 공급 기능, 주거 기능 등을 갖추고 있어 생산보다는 소비 중심의 기능을 하며, 제3차 산업 인구가 95% 이상을 차지한다. 시장은 일반시장 2개와 백화점 · 연쇄점 등이 있다.
교통은 조선시대 이후 서울로 올라오는 통행로의 하나였으나 47호선의 확장, 전철의 개통으로 교통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도로는 시외에 경부고속도로 · 국도 1호선 · 남부순환도로 등과 연계되어 있어 외부지역과 교류하는 데 편하다.
그러나 시내 도로는 적고 행정기관 등이 집중되어 있어 통근시에는 외부 차량이 많아 체증이 심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외곽도로를 건설했으나 서울∼과천, 과천∼경부고속도로간은 상습 체증지역이다.
도로는 국도 47호선이 안양시에서 들어와 중심가를 지나 삼거리에서 동북진한다. 국도 47호선은 북동부 시외곽에서 경부고속도로와 만나고, 남쪽에서는 의왕시를 거쳐 경부고속도로와 연결된다.
서울∼과천간의 상습 체증을 막기 위해 1994년 지하철 서울과천 · 평촌선이 개통되어 차량에 의한 체증을 다소나마 덜어주고 있다. 그러나 통근시에는 출퇴근 인구로, 주말에는 경마장 · 동물원 · 미술관과 등산을 떠나는 인구로 서울∼과천선은 통행량이 매우 많다.
우리나라의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청계산을 중심으로 한 자연적 관광자원과 청계사 주변의 문화적 관광자원, 서울대공원 등의 시설자원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청계산은 경기도 과천시 · 의왕시 · 성남시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 능선을 따라 등산하기에 알맞은 산악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능선에 올라서면 관악산과 서울대공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산이다.
청계산 기슭에 있는 수종폭포는 과천동폭이라고도 하는데, 한여름이면 시원한 물줄기를 분사시키는 피서지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청계산 기슭에는 청계사 · 청룡사 · 망경대 같은 사적관광지가 있으며, 마을 입구인 청계동은 아직 주택이 개량되지 않은 옛 마을 그대로의 모습으로 시골 정취를 한결 더해준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막계동에 개관되어 시민의 종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서울대공원과 서울랜드는 대단위 종합위락단지로서 가족공원 역할을 다하고 있다. 특히 서울랜드는 10만 평의 시설구역에 세계의 광장 · 삼천리 동산 · 미래의 나라 · 환상의 나라 · 모험의 나라 등 5개 지역으로 나누어져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꿈과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도록 꾸며진 가족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