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군포시·안양시·화성시, 서쪽은 인천광역시 및 황해, 남쪽은 안산시, 북쪽은 부천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6°43′∼126°53′, 북위 37°18′∼37°28′에 위치한다. 면적은 135.05㎢이고, 인구는 39만 825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7개 행정동(30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경기도 시흥시 장현동에 소재한다.
광주산맥의 남서단에 위치하고 있어 낮은 구릉지가 곳곳에 발달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침식지대가 나타나고 있다.
동쪽에는 수암봉(秀巖峰, 395m)이 안양시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에는 마산(痲山, 246m)·군자봉(君子峰, 198m)이 안산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중앙에는 운흥산(雲興山, 204m)·가사미산(可使美山) 등이 솟아 있다.
동쪽에는 안양천의 지류가 북류하고 서부에는 신천천(新川川)·은행천(銀杏川) 등이 황해로 흘러들고 있다. 황해로 흐르는 하천 주변에는 바닷물의 유입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았다.
하천 주변의 평야는 침식평야로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산지의 구릉사면은 과수원이나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해안가는 간석지가 넓게 발달했고 간석지는 최근까지 염전으로 이용되었다가 다시 경지로 전환되었고 최근에는 택지나 공장부지로 이용되고 있다.
지질은 화강암·화강편마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해안에 위치한 관계로 같은 위도의 내륙보다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연평균 기온 11℃, 1월 평균기온 -4℃, 8월 평균기온 25.6℃이며, 연 강수량은 1,240㎜이다.
정왕동의 오이도(烏耳島)에서 조개무지가, 물왕동 운흥산과 정왕동에서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발견되어, 이미 신석기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군자산 서쪽 구릉지대에서 민무늬토기 후기에 속하는 검은간토기조각들이 출토되었으며 조남동에는 고인돌이 남아 있어 해안을 중심으로 청동기시대에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국이 서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려고 할 때 고구려의 장수왕이 이 지역을 점령하여 잉벌노현(仍伐奴縣: 지금의 시흥시와 광명시)·율목군(栗木郡 또는 冬斯肸縣: 지금의 안양시와 과천시)·장항구현(獐項口縣 또는 古斯也忽次: 지금의 안산시)을 설치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각각 곡양현(穀壤縣 또는 穀梁縣)·율진군(栗津郡)·장구군(獐口郡)으로 개칭되었다.
940년(태조 23) 곡양현은 금주(衿州 또는 黔州)로, 율진군은 과주(果州)로, 장구군은 안산현(安山縣)으로 각각 고쳤다. 금주는 『고려사』·『대동지지』에 의하면, 성종 때 시흥(始興)이라고도 하였다는데, 지금의 시흥이라는 명칭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995년(성종 14) 단련사(團練使)가 설치되었으나 1005년(목종 8) 폐지되었다.
1018년(현종 9)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지금의 부평)에 귀속되었으며, 1172년(명종 2) 처음으로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과주는 성종 때 부안(富安) 또는 부림(富林)이라고도 하였으며 1018년 광주목에 속했으나 뒤에 감무가 두어졌다.
1284년(충렬왕 10) 이곳의 용산처(龍山處)가 부원현(富原縣)으로 승격되었다. 안산현은 1018년 수주(水州: 지금의 수원)에 속했다가 뒤에 감무가 두어졌다. 1308년 문종이 탄생한 고을이라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어 안산군이 되었다.
과천향교는 1398년(태조 7)에 창건된 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1690년(숙종 16) 서이리(西二里: 지금의 과천시 관악산 기슭)로 옮겨 새로 지었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가 개혁될 때 금주는 금천현(衿川縣)으로, 과주는 과천현(果川縣)으로 개칭되어 안산군과 함께 모두 경기도에 귀속되었다.
1414년 금천현과 과천현이 합쳐져 금과현(衿果縣)으로 불렸다가 몇 달 뒤 혁파되었고, 금천현과 양천현(陽川縣)이 합쳐져 금양현(衿陽縣)으로 불렸다가 1416년 다시 나뉘어 금천으로 개명되고 현감이 두어졌다.
1456년(세조 2) 금천현이 과천현에 병합되었으나 얼마 뒤 복구되었다가 1795년(정조 19) 시흥현이 되었다. 안산군은 1467년 강희맹(姜希孟)에 의해 연성(蓮城)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1793년 수원부에 잠시 이속되었다.
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인천부 시흥군·과천군·안산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 3군 모두 4등군으로서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1914년 군면 통폐합시 금천군·안산군·과천군이 통합되어 시흥군이 되었다.
근대 인물로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다가 자결한 조병세(趙秉世), 1908년 의병으로 군자금조달을 목적으로 독립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복역한 박성삼(朴聖三), 애국지사이며 소년운동가였던 조철호(趙喆鎬), 3·1만세운동으로 붙잡혀 복역한 성주복(成周復)·한영석·윤동욱(尹東旭) 등이 있다.
1949년 8월 15일 안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군의 일부가 2차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1963년 1월 1일 신동면과 동면의 5개 리가 3차로 서울에 편입되었고 화성군 일왕면의 9개 리가 의왕면(儀旺面)으로 개칭, 편입되었다.
1970년 6월 10일 서면 광명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 7월 1일 안양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에서 분리되었다. 1979년 5월 1일 남면이 군포읍으로, 서면이 소하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수암면·군자면의 13개 리와 화성군 반월면 일부에 반월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0년 12월 1일 의왕면과 소래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1년 7월 1일 광명출장소와 소하읍이 합쳐져서 광명시로 승격되었다. 1982년 6월 10일 과천면에 과천지구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6년 1월 1일 과천시로 승격되고, 반월지구출장소도 안산시로 승격되어 시흥군에서 분리되었다.
1989년 1월 1일 군포읍과 의왕읍이 각각 시로 승격되었고, 시흥군 소래읍과 군자면·수암면이 합쳐져서 시흥시로 승격되었다. 1991년 중림·연성의 2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각각 동으로 승격되었고, 1994년 6월 22일 거모동을 군자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95년 4월 20일에는 수암동·장상동·장하동 및 화정동 일부가 이웃 안산시로 편입되었다. 같은 해 11월 15일 무지동이 무지내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1997년 7월 1일 시청 소재지가 장현동으로 옮겼다.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으로는 정왕동의 시흥 오이도 유적(사적, 2002년 지정)과 그곳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가 있다. 조남동의 서남향 구릉지에는 8기의 조남리 지석묘(경기도 기념물, 1988년 지정)가 분포해 있으며, 군자산 서쪽 구릉지대에서는 민무늬토기 후기에 속하는 검은간토기의 조각이 출토되었다.
군자산에는 삼국시대에 한강 유역과 남양만을 연결하는 요새지의 구실을 하했던 군자산성지가 있는데 둘레 400m, 높이 10m이며, 삼국시대의 토기조각이 발견된다. 또 이곳에는 신라 경순왕의 사당이 있었다는 성황당지가 있다.
사지로는 원당사지(元堂寺址) 등이 있으며, 대야동의 소래산 정상 동쪽 암벽에는 높이 14m, 어깨너비 3.75m의 거대한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보물, 2001년 지정)이 선각(線刻)되어 있는데 표현양식으로 보아 조성시대는 고려 초기로 추정되고 있다.
하상동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서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강희맹선생 묘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1985년 지정), 거모동의 청주한씨 문익공파 묘역(경기도 기념물, 1997년 지정), 군자동에는 박동량선생 묘 및 신도비, 김준용장군 묘 및 신도비가 있다.
방산동에는 청자와 백자 요지(사적, 1999년 지정)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시흥군에 속해 있어서 인근의 과천향교에 교육을 의존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향교의 명륜당 내에 신종묵(愼宗默)이 명륜학교(明倫學校)를 세운 것이 최초이며, 1908년에 광명학교(光明學校)가 설치되었고, 1910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어 쌍명학교(雙明學校)가 되었다.
그 뒤 1944년에 과천향교·안양향교·시흥향교 등 세 향교가 통폐합되어 1997년에 과천향교로 개칭되었다. 1911년에는 시흥군내의 군자와 시흥에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그 뒤 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7개교, 중학교 21개교, 고등학교 15개교가 있다. 그리고 경기과학기술대학교과 한국산업기술대학이 있다.
이 고장의 민속놀이에는 얼레공놀이·두레놀이·연날리기·씨름·윷놀이 등이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놀이로는 새우개장승놀이와 군자성황제를 비롯하여 얼레공놀이를 들 수 있다.
얼레공놀이는 넓은 들판이나 잔디밭 혹은 마당에서 벌이는 놀이로, 적당한 인원이 양편으로 갈려서 나무옹이를 다듬어 만든 공을 120㎝가량 길이의 끝이 휘어진 나무채로 치면서 노는 필드하키와 비슷한 놀이이다.
먼저 양편의 주장이 경기장 중앙에 파놓은 구멍에 놓여진 공을 서로 빼앗기 위해 공을 어루는 데서 경기가 시작되며, 자기편끼리 나무채로 공을 연결하면서 공을 상대편 문 밖으로 먼저 처넣음으로써 승부를 가리게 된다.
이 놀이는 딱딱한 공과 나무채를 휘두르는 것이므로 위험성이 있는 거친 놀이지만 씩씩하고 남성적인 면이 있어 젊은 청년들이 즐겨 행했으며, 특히 나무꾼들 사이에서 성행하였다.
유래가 비교적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포동의 당제사가 유명하다. 매년 음력 정월 초순에 날을 골라 자정을 기해 동네에 있는 당집에서 지내며, 제수로는 돼지·조라·메 등을 쓰는데 돼지는 통째로 바치고 메는 24그릇을 떠놓는다.
제주와 집사·축관은 모두 5명으로, 제를 지내기 보름 전에 마을사람들이 생기복덕을 보아 뽑으며, 선출된 제관들은 부정한 일이 없도록 목욕재계하고 근신해야 한다. 마을사람들도 제일이 정해진 뒤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누구도 마을의 출입이 규제되고, 제사 때 사용할 우물을 청소한 다음에는 우물의 사용마저 금한다.
이 당제에서는 특별히 음식을 많이 차려서 먹거나 두레놀이를 곁들여 놀거나 하지는 않으며, 나름대로의 엄격한 관례대로 제를 진행함으로써 엄숙하게 동네의 안위와 농사의 풍년을 빌고 어민들의 풍어를 기원하게 된다.
제사가 끝나면 제물로 썼던 음식을 동네 가구 수대로 몫을 나누어 골고루 음복한다. 또한, 당집 옆에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도 외처에서 몰려오는 액운을 막아준다 하여 신성시하고 있다.
이 고장에는 「군자봉전설」 등의 풍수전설과 「피흘리고개전설」 등의 지명전설을 비롯하여 많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군자봉전설」은 심술궂은 노인과 지관에 대한 이야기이다. 옛날 안산(옛날의 군자)에서 권세가 당당했던 유씨 종가에 심술궂은 유씨 노인이 살고 있었다. 노인은 별다른 이유 없이 마을사람들을 괴롭혔고 성미도 포악하여 집안의 종들도 못살게 굴고는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종을 심하게 매질하여 숨지게 했는데, 그 비참한 광경을 목격한 종의 아들은 그 길로 집을 나가 금강산의 어느 절에 들어가 지술(地術)을 익혀 10년 후 유능한 지관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유씨 노인에게 군자봉에 가서 높이를 3자 3치만 낮추면 더욱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욕심많은 유씨 노인은 그 말을 곧이 듣고 인근 주민을 동원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다. 지관은 다시 산소 밑에 있는 신도비를 위로 10자만 끌어올리라고 이르고는 마을을 떠났다.
유씨 노인이 그 말에 따라 신도비를 끌어올리자 받침이었던 거북의 발에서 선혈이 쏟아졌다. 이에 놀란 유씨 노인이 그 바위를 깨뜨리자 왕벌 두 마리가 바위틈에서 튀어나와 지관이 간 쪽을 향해 날아갔다.
지관은 그때 김포로 가서 용가마(무쇠솥)를 쓰고 있었는데, 왕벌 두 마리가 날아와 솥을 쏘기 시작하였다. 한참 후 왕벌들이 기진맥진하여 죽어버리자 지관은 솥을 벗어던지고 어디로인가 가버렸다. 그 뒤 유씨 집안은 가세가 차츰 기울어 마침내는 패가가 되었다 한다.
피흘리고개는 옛날의 수암면 조남리 묘재마을(지금의 산현동)에서 생골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인데, 다음과 같은 유래담이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침입하여 고개 건너편에 진을 치게 되니 한 여인이 자진하여 적정을 살피겠다고 나섰다.
그녀는 왜군진영으로 가서 모두가 잠자고 있음을 확인한 뒤 암호로 “다자귀야!”를 외쳤다. 이 소리를 들은 우리편 군사는 기습을 감행하여 수많은 왜군을 모조리 처치할 수 있었다. 그때 왜군이 흘린 피가 도랑을 이루며 흘러내렸으므로 그 뒤 이 고개의 이름을 ‘피흘리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이 밖에도 「하연(河演)의 묘이야기」·「생금집전설」·「장롱바위전설」·「포리의 걸뚝이야기」 등 많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이 고장은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까운 관계로 서울에서 많이 불리는 「노랫가락」·「창부타령」·「양산도」·「한강수타령」 등이 많이 불린다. 이곳의 토속민요는 대부분 노동요이며, 이 중에서도 논농사와 관계되는 것이 주종을 이룬다. 곧 모심을 때 부르는 소리로 「에헤요」·「열소리」 등이 있고, 논에서 김을 맬 때 부르는 소리로는 「상사소리」·「방아소리」 등이 있다.
이 중에 「에헤요」는 경기의 중부지방에서 널리 부르는 소리로 “여기 저기다 심어도 양석 자리로 심어라/어화 에헤야 어허리 에헤야…….”라고 부른다.
「에헤요」는 서도소리의 영향을 받은 강화도 등 경기 서북부의 모심기소리, 그리고 강원도의 영향으로 「아리랑」을 부르는 안성·여주 등의 모심기소리와 구분되는 지역적 특성을 보이는 노래이다.
역시 모심기소리의 하나인 「열소리」는 경기도 고양시에서도 부르는데, 그 사설은 숫자를 하나 하나 세어가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곧 “에에 하나아 두울 둘이면 셋 꽂어어/(받는소리) 에에 이이 하나아 두울 셋이면 꽂는다·셋이며는 넷 다아섯·(받는소리) 에에 다섯 꽂으면 여섯이 간다…….”처럼 부른다.
이 밖에 이곳의 토속민요로는 집터를 다질 때 부르는 「지경소리」, 장례를 치르며 부르는 「상여소리」와 「달구소리」가 있다.
지경소리는 ‘긴’것과 ‘자진’것의 두 종류가 있다. 또 시흥의 토속민요 중에는 뱃노래인 「배치기」가 있는데, 「배치기」는 본래 배의 고사나 포구의 도당굿에서 부르던 신앙요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기치다차 닫 감아 이고 연평바다로 조기 실로 간다/어허 에에헤야 어어여 어어 에헤에 어화요/바다에 나갔던 유덕선 묻어드네 강화일경에 돈 풍년 들었다/어허 에에헤야 어어여 어어 에헤에 어화요/삼국충신 임장군이 김선주 불러서 도장원 시켰다…….”와 같이 임장군 혹은 서낭에 관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구성지고 흥겨운 가락과 함께 춤추며 즐기는 유희요로 남아 있다. 시흥의 토속민요도 대부분 선후창으로 부른다. 그러나 「열소리」의 가창방식은 후렴이 없이 교대로 셈을 세어나가는 것으로 보아 교창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배치기」는 처음 3소절을 선창이 사설을 넣어 혼자 부르면, 제4소절부터 제6소절까지는 모두 다 함께 후렴을 부르고, 이어 북·장구·꽹과리 등의 악기로 2∼4소절 연주하고는 다시 선창으로 넘어간다. 이처럼 「배치기」는 가창방식이 특이하다.
전 토지의 28.6%가 임야이고 경지는 27.4%이다. 경지 중 논이 1,647㏊, 밭이 2,060㏊이다. 물왕저수지(物旺貯水池)·도창저수지(道倉貯水池)·칠리저수지(七李貯水池) 등이 주변 농경지에 관개 용수를 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밭작물로 두류·배추·무·파·고추·오이·호박·참외, 특용작물로 참깨, 과실류로 포도·복숭아 등이 생산된다. 쌀은 연성동·거여동·매화동에서 많이 생산되고 채소류는 연성동·인현동·목감동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다. 화훼류는 안산동·거모동 등에서 많이 생산된다.
서울·인천·수원 등 대도시에 인접하여 근교 농업이 발달하고 있는데 특히 포도·복숭아와 같은 과수단지, 목우단지 그리고 화훼 단지가 곳곳에 발달하고 있다.
수산업은 소래강에서 새우·게 등이 많이 잡히고 간석지의 소래염전·군자염전 등은 우리나라 제일의 염전이었으나 시화 공단이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제조업은 전체 인구의 13.9%정도이다. 제조업은 조립금속업·화학공업·비금속공업·종이인쇄업·섬유 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경인공업지역이 포화상태가 되면서 경인 지역의 공업 단지의 필요성이 인식되자 정부는 화성시와 시흥시를 잇는 제방을 막아 시화공단을 건설하였다.
도로는 국도 42호선이 남쪽에서 들어와 시의 동부를 지나 서북진하고 국도 33호선은 안산시에서 북상하여 신천동에서 42호선과 만나 부천시로 들어가고 있다. 철도는 인천∼수원 간의 협궤 철도가 소래의 소금과 인천으로 들어온 석탄을 경인지역에 수송하고 있었으나 1994년 폐쇄되었다. 이 철도가 지나던 길은 인천∼수원 간의 산업도로로 바뀌었다. 최근 수도권 전철 4호선 당고개∼안산 구간이 오이도까지 연장되어 이 시의 시민들의 수송을 원활하게 해주고 있다. 북쪽에는 제2경인고속도로가, 남쪽에는 시화∼안산 간 고속도로가 동남쪽에, 그리고 서해안고속도로가 서남쪽으로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동북부에는 관악산·남한산 등에 접하여 고지대를 이루고 서남부는 낮은 구릉성 산지들이 산재하여 준평원에 도달하는 지형적 특징을 띠고 있다. 특히, 서울과 인접한 관계로 근교농업이 발달하여 채소·과수·화훼 등의 특용작물 재배가 활발하였으나 서울의 주거기능 분담으로 쇠퇴하였다.
주요 관광지로는 관악산 연주암과 절터, 그리고 석불 등이 있으나 타지역에 비교해 관광지는 빈약한 편이다. 그러나 전역에서 빗살무늬토기와 군자산 서쪽 구릉지대에서 민무늬토기가 발견되어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았음을 증명해주는 관광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또한 침식을 받아 이루어진 군자산에는 삼국시대에 한강 유역과 남양만 지역을 연결하는 요새 구실을 했던 군자산성터가 있고, 신라 경순왕의 사당이 있었다는 성황당 터가 있어 관광명소로 기대된다.
사적지로서는 원당사 터가 있으며, 소래산 정상 동쪽 암벽에는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이 선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