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성남시 · 용인시 · 수원시, 서쪽은 안양시 · 군포시, 남쪽은 화성시, 북쪽은 과천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03′∼127°55′, 북위 37°17′∼37°25′에 위치한다. 면적은 53.98㎢이고, 인구는 15만 7740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6개 행정동(11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에 있다.
남남서 방향으로 지나던 광주산맥이 이 지역에 이르러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다. 동북쪽은 400∼600m의 높은 산이 솟아 있고, 서남쪽은 100m 내외의 낮은 구릉지가 발달하고 있다.
동쪽에는 청계산(淸溪山, 429m) · 국사봉(國師峰, 540m) · 바라산(428m) · 백운산(白雲山, 567m), 서쪽에는 모락산(帽洛山, 385m) · 오봉산(五鳳山, 205m) · 구룡산(九龍山, 146m) 등이 있다. 북쪽에는 응봉(368m)이 과천시와 경계선을 이루고 있다.
동부의 산지에서 발원하는 안양천(安養川)은 서류 및 북류하는 학의천(鶴儀川) · 청계천(淸溪川) 등과 합류하면서, 서쪽 안양시와의 경계에 이르러 서북류하면서 한강으로 흘러간다.
지질은 화강편마암이고 토양은 고지에는 적황색토 또는 암쇄토가, 저지에는 회색토나 충적토가 분포하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11℃, 1월 평균기온은 -4.7℃, 8월 평균기온은 25.5℃로 한서의 차가 30℃ 이상을 넘어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장마 때는 지형성 강우가 동부 산지를 중심으로 내리고 있다. 연강수량은 1,256㎜이다.
이 지역에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발견된 바 없지만 인접지역에서 유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내손동과 학의동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었고, 인근의 부곡동에서 고인돌과 민무늬토기편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한강유역의 남단에 위치해 서쪽으로는 서해안을 지척에 두고, 동남으로 국토의 남단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일찍이 삼국시대에는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삼국시대에 의왕지역은 백제에 속했으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 지역을 점령해 율목군(栗木郡)을 설치하였다. 그 뒤 신라의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율진군(栗津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 과주군(果州郡)으로 고쳐졌고, 990년(성종 9)∼994년에 다시 부림(富林)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광주목(廣州牧)에, 1284년(충렬왕 10)에는 부원현(富原縣)에 속하였다.
조선 초인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과천현 관할에 속했다가, 1414년 금과현(衿果縣)으로 개칭되면서 이 현에 소속되었다.
1895년에는 광주군에 속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광주군의 의곡면(儀谷面)과 왕륜면(旺倫面)이 통합되어 수원군(水原郡) 의왕면이 되었다. 그리고 1936년 수원군 일왕면(日旺面)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에는 화성군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일왕면의 9개 리가 의왕면으로 되어 시흥군에 편입되었고, 1980년 12월 1일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 15일 화성군 월암리와 초평리가 의왕읍에 편입되었고, 같은 해 3월 1일 의왕읍 동부출장소가 신설되었다.
그 뒤에도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인구의 격증으로 인해 행정수요를 유발하게 되어 1989년 1월 1일 의왕시로 승격되었고, 1994년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일부와 군포시 당정동 일부가 이 시에 편입되었다. 2007년에 한자명을 ‘의왕시(義王市)’로 바꿨다.
불교 유산으로 청계동 청계산에는 고려 때 문신으로 평양부원군에 봉해진 조인규(趙仁規)가 창건한 청계사가 있는데, 경내에 청계사 동종과 청계사소장 목판 등이 있다. 청계사는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고, 청계사 동종은 2000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청계사소장 목판은 1988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청계산 정상에는 고려말 명유이자 충신이었던 조윤(趙胤)이 개성을 바라보며 통곡했다는 망경대(望京臺) 있다. 고천동에 소재한 지금의 시청자리는 조선 정조 때 건립한 사근행궁지(肆覲行宮址)로서, 정조가 화산의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할 때 행궁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내손동은 조선시대에 서울 · 과천 · 인덕원(仁德院) · 수원을 잇는 교통의 분기점으로서 갈산주막(葛山酒幕)이 있었던 유지가 있고, 청계동에는 동양원지(東陽院址)가 있다.
건축물로는 청계동에 하우현 성당(경기도 기념물, 2001년 지정)가 남아 있다. 능묘로는 내손동에 임영대군 이구 묘역 및 사당가 있다. 문헌으로는 왕곡동 청풍김씨재실에는 김유 초상(보물, 2006년 지정)이 보존되어 있으며, 내손동에 청동 은입사 향완(보물, 1963년 지정) · 『제왕운기』(보물, 1965년 지정) · 『삼국유사』(보물, 1965년 지정)는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임영대군 이구 묘역 및 사당은 2000년 경기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과천시 문원동에 시흥향교(始興鄕校: 옛 이름은 果川鄕校)가 있어 이 지역은 이 향교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36년에 고천공립보통학교가 처음으로 개교했는데, 광복과 함께 고천초등학교로 개명하였다.
그 뒤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에 부곡초등학교, 1949년에는 덕장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와 인구의 증가로 1984년에 백운초등학교가 개교하는 등 점차 학교수가 늘고 있다.
중등교육기관은 1985년을 전후해 설립하기 시작했는데, 1985년에 의왕중학교가, 1988년에 백운중학교가 개교했으며, 1984년에 우성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내손동에 계원조형예술대학, 월암동에 한국철도대학이 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3개교, 중학교 7개교, 고등학교 5개교, 계원예술대학교, 한국교통대학교 의왕캠퍼스가 있다.
이 고장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씨름을 들 수 있다. 씨름은 힘과 기를 겨루는 경기의 하나로 옛날부터 어느 곳에서나 성행하였다. 그 가운데 의왕시의 경우는 그 규모가 커서 씨름판이 벌어지면 수원 · 안양 할 것 없이 각처에서 씨름꾼과 구경꾼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는 대축제가 벌어지고는 하였다.
씨름판은 고천동 앞개울의 넓은 하천공터에서 음력 7월 15일 백중을 전후해 열리며, 으레 개울둑이나 씨름판 주위에는 장사꾼들이 물건을 팔고 술집과 음식점이 즐비하게 가설되어 난장(亂場)이 벌어진다.
씨름은 연소자가 하는 애기씨름에서부터 어른씨름으로 이어지면서 여러 날 계속되는데, 예전에는 최종적으로 이긴 사람에게 황소 한 마리를 상으로 주었으나, 그 뒤에는 송아지를 주거나 백미 혹은 광목으로 대신 주기도 한다.
이 고장의 동제로는 오전동의 산신제가 유명하다. 이 산신제는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중단된 일이 없이 내려왔다는 것도 마을사람들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제는 매년 음력 10월상달 초순에 택일해 그 날 새벽 5시경에 지내는데, 동쪽에 가장 높이 위치한 백운산의 줄기로 내려온 마을 뒷산 중턱의 당집에서 거행한다. 제주는 제일을 정하기 이전에 그를 도와줄 집사와 축관 등 5명과 더불어 선출되며, 제주의 사주(四柱)에 따라서 제일도 결정된다.
제주는 제 지내기 7일 전부터 대문 앞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깔아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목욕재계를 하며, 부정하지 않도록 근신해야 한다. 제사 때 사용할 우물 역시 정결하게 청소한 뒤에는 제기를 닦는 등 제사에 관계된 일에만 사용하고, 일반주민들은 제가 끝날 때까지 사용이 금지된다.
제물로는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바치며 나름대로의 엄격한 절차로 제를 지낸다. 산신제가 끝나면 세 집을 정해 음푸국(쌀가루국에 쌀경단을 넣고 끓인 국)과 고기 · 술 등을 마련하게 해 마을사람이 모두 모여 음복한 다음 잔치를 벌인다. 이 밖에 고천동 · 왕곡동에서도 이와 비슷한 산신제가 10월경에 거행된다.
이 고장에는 많은 지명유래담을 비롯해 「오봉산전설」 · 「월암 안터전설」 · 「성삼문전설」 · 「모락산전설」 · 「정삼품의 당상소나무전설」 · 「자진골전설」 등이 상당수 전하고 있다. 그 중 청풍김씨 종중에 전하는 「오봉산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중국의 유명한 지관이 자기 나라에서 죄를 짓고 조선땅으로 피신해 있다가, 청풍김씨네에게 은혜를 입고 살았다. 그는 은혜를 갚기 위해 청풍김씨네 노부인의 산소자리를 잡아 주고는 돌아갔다. 장례식날 광중 속의 바위를 들어내지 말라는 것이 그 지관의 당부였는데, 그 바위가 너무 얕아 더 파느냐 그만두느냐 의론이 분분할 때, 광중을 지키던 막내상제가 광중에 들어가 바위에 올라섰다.
그는 기우뚱거리는 바위의 한 끝을 들어올려 아래를 보고는 놀랐다. 옥동자 다섯을 앞에 두고 또 한 명의 옥동자가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놀라움에 바위를 도로 내려 놓는 순간 무엇인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러고는 기우뚱거리던 바위도 꽉 밀착된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이를 비밀로 덮어 두었고, 장례는 그냥 바위 위에 하관하고 지냈다.
한편, 중국으로 돌아간 지관은 자기 아버지로부터 꾸중을 듣고 다시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 바위 아래 다섯 옥동자 앞에 서 있던 또 한 명의 옥동자는 역적모의를 하는 중이어서, 그 바위 위에 하관해 묘를 쓰면 청풍김씨네는 역적이 나오게 되어 집안이 망한다는 것이었다. 은혜갚음을 이런 식으로 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 아버지의 나무람이었다.
조선땅에 다시 온 그 지관은 산소를 옮겨 쓰자는 제의를 하는데, 막내상제가 그 동안 지녔던 비밀을 이야기하였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중국 지관은 그제야 한숨을 쉬고 말하였다.
그때 바위를 도로 내려놓을 때 무엇인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는 역적모의를 하던 옥동자의 머리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기우뚱거리던 바위도 다시 지면과 밀착된 것이니 다행한 일이다. 다섯 옥동자는 청풍김씨네서 다섯 정승이 나온다는 뜻이다.
이런 말을 남기고 지관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뒤 그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러나 사실은 오봉산이 아니라 좀 떨어진 곳의 봉우리까지 합치면 육봉산이 된다. 지금도 의왕시청 앞 경수산업도로 건너편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의왕시는 옛 시흥군 의왕읍과 화성군의 몇 개 리가 합해 이루어진 곳인데, 의왕읍은 본래 화성군 일왕면의 일부가 시흥군에 편입되어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 시의 민요는 화성군과 함께 경기 중부지방의 특색을 보인다.
과거 이곳의 주된 산업은 농업이어서 토속민요도 대부분 논농사 중심의 농업노동요이다. 논매기소리로는 「에헤요」가 있고, 김매기소리로는 「방아소리」 · 「상사소리」 · 「둘레소리」 · 「얼카덩어리」 · 「면생이」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에헤요」는 경기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모심기소리로서, 자진중중모리장단에 맞는다. 구성음은 미 · 라 · 도 · 레 · 미로 되어 있고, 미로 마치는 이른바 메나리목으로 불린다. 이 소리를 석양녘에 부르면 피로도 잊고 일손도 보다 가벼워진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김매기소리가 발달되어 있어서 그 장르가 많은 편이다.
「방아소리」는 “경기도라 여주이천 물방아가 제일인데 오곡백곡 잡곡중에 자채벼만 찧어보세/ 에에야 에라 우이겨라 방아로구나……산에올라 수진방아 들에내려 디딜방아 돌고돌아 연자방아 시름잊고 찧어보세/ 에에야 에라 우이겨라 방아로구나……”처럼 부른다. 또한 김매기소리로서 「둘레소리」는 용인 등의 경기 동부지방에서 부르는 민요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주변지역의 민요를 수용해 장르를 다양화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고장 민요의 가창방식은 선후창이 대부분으로서 별다른 특색은 없다. 그런데 「면생이」의 가창방식은 4, 5명이 한 조를 이루어 교창하는 일이 많다.
가사는 “우우∼어 아∼아/ 우∼우우 에에∼이” 하는 식으로 의미 없는 입타령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밖에 이 지역에서 불러온 토속민요는 집터 다질 때 부르는 「지경소리」가 있고, 장례를 치르며 부르는 「상여소리」와 「회방아소리」가 있다.
그리고 여성들이 부르는 「시집살이노래」 등의 음영민요(吟詠民謠)와 「노랫가락」 · 「창부타령」 · 「경복궁타령」 등의 통속민요들도 이곳에서 불려왔다.
전 토지의 64.3%가 임야이고 농경지는 10.7%에 불과하다. 이 밖에 대지 7%, 교통용지 4.6%이다. 중앙의 백운저수지(白雲貯水池)와 남쪽의 왕송저수지가 있는데 이들 저수지는 주변 지역에 발달한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과거에는 농업이 발달했었으나 안양시의 공장이 의왕시로 입지 이전되면서 농업이 크게 쇠퇴하고 있다. 경지 중 논은 157ha, 밭 425ha이다.
주요 농산물로 쌀 이외에 무 · 배추 · 고추 · 들깨 · 참깨 등이 생산되고 있으나, 생산량은 적다. 다만, 원예작물의 재배와 낙농업 등이 상업적인 방법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저수지와 하천 주변에 관광농업이 약간 발달하고 있으며, 산지가 많으나 임산물의 생산량은 많지 않은 편이다. 밤 · 도토리가 생산되고 있다. 농가 인인구는 전체 인구의 2.1%이고, 제조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4.9%이다.
경인공업지의 일부로 교통이 편리하고 임야가 많아 공장입지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 공장이 계속 늘고 있다. 주요 제조업으로는 섬유공업 · 조립금속공업 · 식료품공업 등이 발달하고 있다.
도로는 국도 1호선이 남북으로 지나고 국도 47호선이 서북단을 서남 · 동북진하고 있다. 그리고 1993년에 과천 · 의왕 · 경부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고속화 도로가 건설되었고 서울외곽고속도로가 동서로 지나고 있어 외부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하다. 철도는 경부선이 남부지역을 남북으로 지나고 전철 과천선이 국도 47호선과 나란히 지나고 있다.
시역의 대부분은 백운산에서 과천의 청계산으로 이어지는 산지로 되어 있어 주변지역과 더불어 관광지가 분포되어 있다. 중요한 관광지는 자연관광지로서의 백운산 · 청계산 · 왕송저수지 · 백운저수지 등이 있고, 문화역사적 관광지로서는 철도박물관을 비롯해 사찰, 묘역과 신석기시대 · 청동기시대의 역사 유적지가 있어 안양 · 의왕 · 수원을 잇는 관광지로 발전하고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내손동 · 학의동 · 부곡동에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이 있고,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문토기도 출토된 역사 유적지가 있다. 왕송저수지와 백운저수지에는 낚시꾼들이 많아 주말 레저관광지로 유명하다.
모락산 산록면에는 임영대군의 묘가 있고, 청계산 계곡에는 신라 때 창건한 청계사가 있다. 그리고 내손동에는 조선시대 한양 · 과천 · 인덕원 · 수원 · 화성을 잇는 교통의 분기점으로서 길손들이 잠시 쉬어가던 갈산주막터가 있어, 이곳이 교통의 요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조선 정조대왕이 수원 능행길에 사용하던 행궁터가 있었으나 그 곳에 의왕시청이 들어섰고, 경부선 철로변인 월암동에는 철도박물관이 있어 한국의 철도발전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학습 관광지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2,827점의 각종 유물과 실물 차량 18대를 실내외에 진열해 놓고 그 당시의 승무원 복장, 각종 신호체계, 철도부설 기자재 등도 다양하게 구비해 놓고 있다. 간단한 휴식공간도 갖춰놓고 있으므로 가족동반 나들이 장소로 알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