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모시 바탕에 채색. 세로 98㎝, 가로 71㎝. 효령대군의 영정은 조선시대의 대군 초상화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매우 희귀한 예이다. 경기도 과천시 문원동 연주암(戀主庵) 효령각(孝寧閣)에 보존되어 있다.
도상이나 화풍 및 미감이 일반 초상화 계통과 달리 불화(佛畵)나 조사상(祖師像) 계열과 상통되는 점이 적지 않다. 그리고 영정도 특이하게 사찰에 봉안되어 오고 있다. 이는 효령대군이 평소 불교를 숭상하고 또한 연주암에 머물며 암자를 중건했던 각별한 인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효령대군의 영정은 조선 초 · 중기의 실록이나 왕실의 초상화 관계 기록에서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 후손인 이형상(李衡祥)이 1725년 상주(尙州)에 효령대군의 사당을 중건하는 상량문을 지으면서 “마침내 영정을 모실 곳을 쌓았다”고 말했던 점으로 보아, 최소한 18세기 초반경에는 어떤 형태의 영정이 존재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영정의 모습과 상태를 상세히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조선 초 · 중기의 기록에서도 잘 나타나지 않았던 영정이 어떻게 18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나게 되었으며, 나아가 이 연주암의 영정은 그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미상인 채로 남아 있다.
다만 현전하는 연주암의 영정은 조선 후기나 말기 무렵 사찰 주변에서 효령대군의 본래 영정과는 거의 무관한 상태에서 화승(畵僧)에 의해 독립적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도상이나 재료, 기법 등 많은 점에 있어서 일반 초상화보다 불화와의 친연성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우선 대군의 존귀한 영정임에도 불구하고 올이 굵고 조직이 거친 모시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배경 전체를 불투명한 회녹색으로 후채한 것도 일반 초상화에서는 거의 유례가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도상은 기본적으로 대군 초상화로서의 격식을 갖추고자 한 듯, 익선관(翼蟬冠)에 곤룡포(袞龍袍)를 정장하고, 지물(持物)을 손에 든 뒤 용교의(龍交椅: 용의 형상을 새긴 임금이 앉는 의자)와 어탑(御榻: 임금이 앉는 상)이 혼용된 듯한 특이한 의자에 정면으로 앉은 전신상[全身椅坐像]이다. 그리고 목화(木靴: 사모관대를 할 때 신던 신)를 신은 두 발은 의답(椅踏) 위에 팔자로 넓게 벌리고 있다.
익선관에 날개가 없는 것이나 목 부분의 곤룡포 속에 입은 중단(中單)의 깃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황색으로 채색하여 삽금대(鈒金帶: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금띠)라 생각되는 관대를 가슴과 허리에 두 개나 맨 것, 또한 곤룡포의 소매와 치마 끝에 넓은 녹색 단을 댄 것 등은 현전하는 태조어진, 고종어진, 연잉군(延礽君) 초상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특히 녹색의 단을 댄 치마 끝 자락과 소매 밖으로 노출된 중단의 소맷자락을 파도나 톱날처럼 양식화된 굴곡상으로 묘사한 것은 불화의 전형적인 표현법이 전이된 결과라 생각된다. 용교의의 등받이에 녹색의 얇은 천을 걸친 것도 조선시대의 일반 초상화에서는 거의 유례가 없는 것으로서 시왕도(十王圖)나 조사상(祖師像)에서 흔히 사용되던 것이다. 얼굴과 손의 표현이 전혀 현실감과 개성도 없이 관념적으로 묘사되었고, 장년의 용모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주름이 전혀 없이 추상적으로 묘사되었다.
특히 귀가 장대하게 늘어져 이상적으로 신비화된 것도 불화의 전형적인 신체 표현법이 반영되었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이 초상화가, 전래되던 효령대군의 초상화를 이모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느 시기 화승에 의해 사찰 주변에서 창작된 것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해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화법도 일반 초상화보다는 불화와의 친연성이 더욱 많은 편이다. 전반적으로 붉은색과 녹색 및 금분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 언뜻 불화와 매우 흡사한 분위기를 강하게 풍겨 준다. 얼굴은 호분기가 많은 분홍색을 배채(背彩)한 위에 물기가 많고 농담과 굵기의 변화가 거의 없는 붉은색 필선으로 윤곽선을 선묘(線描 : 선으로만 그림)하였다.
그 뒤 같은 붉은색으로 코 주변과 귀 및 얼굴의 양쪽 가장자리 부분을 약간 우려서 간략한 명암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명암 표현 의식이 매우 박약하고 지극히 관념적이다. 눈썹과 수염의 필선은 매우 필세가 있고 세련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매우 규격화되고 양식화된 필선을 단순하게 반복한 형태이다.
입술은 매우 작고 굴곡이 심한 편이며 외곽선도 없이 연지만을 후채하여 표현했다. 익선관은 농묵(濃墨: 짙은 먹물)과 중묵 필선으로 윤곽선과 세부 형태를 선묘하고 금분을 칠했다. 그러나 금분은 거의 박락되고 흔적만이 일부 남아 있다.
곤룡포는 중묵과 담묵(淡墨: 진하지 않은 먹물) 필선을 사용하여 곡선 중심으로 묘사하였으나 옷주름의 형태가 다소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리고 붉은색과 녹색을 후채한 뒤 주름선 주변과 사방의 가장자리 부분을 먹으로 약간 우려서 간략한 명암을 표현하였다.
그 다음 어깨 · 허리 · 무릎 · 치마 부분에 금분을 사용하여 용문(龍文)을 선묘하였다. 용문의 선묘는 속도감이 강하고 굵기의 변화도 풍부하여 세련된 기교가 느껴진다. 손은 분홍색을 후채하고 붉은색으로 선묘한 뒤 먹선으로 일부를 강조했고, 중단의 소매에는 흰색을 칠했다.
지물은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농묵 필선으로 선묘한 뒤 황토색을 칠하였다. 의자는 농묵의 먹선으로 기본 형태를 선묘한 뒤 갈색과 청색 및 녹색을 후채하였다. 그리고 용을 조각한 부분에는 금분을 칠했으나 금분은 거의 박락되어 흔적만 남았다.
의답은 아무런 장식도 없는 단순한 형태인데, 반우향의 측면관(側面觀: 옆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묘사되어 정면관(正面觀: 앞에서 바라본 모습)의 신체나 의자와 투시법상 심각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그 결과 좌측면의 밑변을 묘사하지 못하고 생략한 상태로 남겨 놓고 말았다. 모시 바탕이 헤어지고 채색에 박락된 부분이 많아 보존 상태가 다소 좋지 않은 편이다. 지금은 액자 표구 상태로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