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잡 초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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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잡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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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신잡(申磼)을 그린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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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신잡(申磼)을 그린 초상화.
개설

1977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04㎝, 가로 65㎝.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노은영당(老隱影堂)에 있다.

신잡의 초상화는 그동안 1604년 또는 1607년에 영의정 김귀영(金貴榮)의 족질(族姪)인 통사랑(通仕郞) 김이혁(金履奕)이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는 김이혁이 그린 다른 초상화와 혼동한 데서 초래된 와전이다. 김이혁이 그린 초상화는 1607년 신잡이 67세 되던 해에 선조의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대동수춘연(大同壽春宴)”을 거행한 뒤 여기에 참석했던 노인들을 그린 화첩본 화상이다.

문중에는 현재 이 영정과 도상은 같지만 옷주름 옆에 강한 명암법을 구사하여 조선 후기 양식을 보여 주는 초상화가 1폭 별도로 전한다. 문중에서는 김홍도(金弘道)가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독송재행적(獨松齋行蹟)』에 의하면 초상화가 퇴락하여 1800년 3월 서울로 가지고 가서 “화공을 수소문해 모사하였다(董工模寫)”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김홍도를 직접 언급한 기록은 없다.

현재 노은영당에 전하는 이 영정은 초상화 전문의 최고 화원만이 그릴 수 있는 초상화이다. 17세기 초반 공신도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많이 갖추고 있는 점으로 볼 때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된 뒤 그려진 공신도상일 가능성이 크다.

내용

도상은 바닥에 채전(彩氈)을 깔고 교의자(交椅子)에 반우향으로 앉아서 발을 발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공수(拱手: 두 손을 마주 잡음)한 전형적인 초상화[交椅坐像]이다. 단령(團領: 깃을 둥글게 만든 공복) 옆 자락과 뒷자락의 과장된 트임이나 단순화된 묘사, 양식화된 이중 삼각형 형태도 전형적인 특징들과 같다. 둥그렇게 말린 교의자의 손잡이나 그 평면적인 처리도 통상의 예와 거의 같다.

단령의 옷주름은 짙고 강하며 직선적인 먹선을 사용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묘사한 뒤 자주색과 군청색으로 담채했다. 그리고 단령의 운보문(雲寶文)은 먹선으로 문양의 외곽을 선묘한 뒤 내부의 문양을 더 짙은 먹으로 칠하여 표현했다. 단순화된 옷주름과 운보문의 비구조적인 묘사가 결합하여 초상화 전체에 매우 강한 단순성과 평면성을 부여해 준다. 이는 주인공의 강한 정신성을 전하는 독특한 심미적 효과를 주고 있다.

오사모(烏紗帽)의 풍만한 형태와 크고 대담한 문양 표현도 통상의 예와 같다. 하지만 모정(帽頂)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다소 높은 편이다. 같은 호성공신상인 홍진(洪進)의 초상화에서 보듯 이러한 예들도 더러 있기 때문에 17세기 초의 공신상들 사이에서도 다소의 진폭이 있었던 듯하다.

흉배는 구름과 갈대를 배경으로 기러기 두 마리를 그린 운안흉배(雲雁胸背)이고 각대(角帶)는 삽금대(鈒金帶)이다. 흉배와 각대에는 금분을 사용하여 고귀한 의미와 장식적 효과를 강조하였다. 흉배 상부의 금분이 수염 위에 칠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금분은 그림을 거의 완성하고 나서 맨 마지막에 칠했음을 알 수 있다.

얼굴은 굵고 가는 변화가 어느 정도 나타나 있는 황갈색의 필선으로 기본 윤곽선을 묘사한 뒤, 윤곽선 주변을 따라서 매우 미묘한 층차를 주어 가며 담갈색으로 우리는 맑고 칼칼한 선염법을 사용하였다. 맑은 갈색 담채로 얼굴의 얽은 자국을 표현하였다. 수염도 필선에 농담의 차이를 주어 가며 정세하게 묘사한 뒤, 다시 담묵으로 섬세하게 우려서 수염의 덩어리까지 드러내고자 하였다. 얼굴의 표현법이 17세기 초의 일반적인 예들에 비하여 다소 정세하고 세련된 편이기 때문에 후모(後模)되거나 개채(改彩)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홍진의 초상화에서도 이와 유사한 특징들이 발견되는 점으로 볼 때 17세기 초 공신도상들 사이에 나타났던 진폭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듯하다.

발을 올려놓는 발받침대의 윗면에는 매우 촘촘한 사선으로 돗자리의 올을 일일이 표현했다. 바닥의 채전은 가는 먹선으로 문양의 윤곽을 선묘한 뒤 그 안에 석채(石彩: 진채)를 다소 거칠게 점묘(點描)했다.

단령의 옷자락이 벌어지며 보이는 안감과 바지에도 녹색과 청색의 강한 석채를 사용하였다. 이는 단령의 단순한 무채색과 바닥의 화려한 석채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주는 절묘한 조형적 효과를 얻고 있다.

비단은 올이 촘촘하고 고우며 폭이 넓은 통폭을 사용하였다. 군데군데 약간의 박락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현재는 유리 액자로 개장되어 표구의 원형을 잃은 상태이다.

참고문헌

『독송재행적(獨松齋行蹟)』
『한국의 초상화』(조선미, 열화당, 1983)
문화재청(www.cha.go.kr)
집필자
강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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