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金正喜)가 1849년(헌종 15) 경연(競演)의 형식을 빌어 문하(門下)의 서화가(書畵家) 14명을 지도하면서 그들의 작품에 대하여 평론했던 내용을 모아 놓은 서화비평서이다.
고유섭(高裕燮)의 『조선화론집성(朝鮮畵論集成)』본에는 표제 밑에 ‘이초당독본(二艸堂讀本)’이라 부기하여 조선 말기의 중인화가 전기(田琦)의 수택본에서 전재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현재 전기의 도장이 찍힌 필사본 1책이 개인 소장으로 전하고 있다. 전기가 1849년(헌종 15) 9월에 쓴 서문과 당시의 관련 기록에 의하면, 이 책은 1849년 여름 전기의 이초당(二艸堂)에서 열린 서화 경연에 대한 김정희의 평어(評語)를 전기가 보관하고 있다가 유재소(劉在韶)에게 부탁하여 기록한 것이라 한다.
김정희가 1848년 12월에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뒤 지난 10년간 제자들의 공부를 점검하고 아울러 자신이 생각한 서화의 이상적인 지향점을 제시해 준 것이다. 이 서화 경연이 김정희가 유배를 떠나기 전인 1839년(헌종 5)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겨우 10대 소년에 불과했던 전기가 이런 일을 자신의 집에서 주도했다는 것은 다소 무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김정희가 김계술(金繼述)의 해서(楷書)를 평하면서 “예전 그대로 10년 전의 모습이다.”라고 말했던 점을 보아도 이는 1849년에 있었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본래 서예가 8명(김계술(金繼述), 이형태(李亨泰), 유상(柳湘), 한응기(韓應耆), 이계옥(李啓沃), 전기(田琦), 유재소(劉在韶), 윤광석(尹光錫))이 묵진(墨陣)을 이루고, 화가 8명(김수철(金秀哲), 허유(許維), 이한철(李漢喆), 박인석(朴寅碩), 전기(田琦), 유숙(劉淑), 조중묵(趙重默), 유재소(劉在韶))이 회루(繪壘)를 이룬 뒤 서화를 번갈아 가며 경연하고 비평했다. 하지만 전기와 유재소는 서화에 모두 참여하였기 때문에 실제 참여 작가는 총 14명이다. 경연과 비평이 행해진 것은 1849년 6월 20일부터 7월 14일까지 7회로서, 서예 4회, 회화 3회이다.
서예는 주련[聯]·편액[扁]·해서[楷]의 3종을 대상으로 하여 각 종마다 ‘매화시경(梅華詩境)’, ‘운하울흥(雲霞蔚興)’ 등과 같은 문장을 제시하고 모든 참여 작가가 똑같이 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회화는 ‘추산심처(秋山深處)’, ‘추수계정(秋水溪亭)’ 등과 같은 화제(畵題)를 각 개인별로 달리 제시하고 각자 주어진 화제를 그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김정희의 비평 내용은 기본적인 학습태도는 물론 구체적인 기법이나 이상적인 심미관 등 서화에 관한 광범위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그 기본적인 관점은 금석학(金石學), 고증학(考證學) 및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를 토대로 하고 있다.
김정희가 겸재(謙齋)정선(鄭敾)의 동국 진경(東國眞景)과 원교(圓嶠)이광사(李匡師) 계통의 동국진체(東國眞體)를 비판하고, 윤두서(尹斗緖)와 심사정(沈師正) 등의 남종문인화 계통과 이인상(李麟祥), 강세황(姜世晃) 등의 비학(碑學)을 높이 평가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서화관과 표리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