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바탕에 채색. 세로 176㎝, 가로 100㎝. 200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김완은 어려서부터 용맹이 알려져 임진왜란 때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李福男)의 휘하에 들어가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책훈되고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벼슬은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황해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등을 지냈는데, 해치와 모란문양이 수놓아진 흉배와 학정금대를 착용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는 17세기 전반에 그려진 전 구인후 초상에서도 확인된다. 황해도 병마절도사 시절의 품계와 부합된다. 따라서 진무공신상은 아니고 다소 후대에 그려진 초상으로 생각된다.
사모의 높이가 매우 낮으며 양각이 넓고 둥근 모양을 보이며, 삼각형의 단령 자락 뒤로 교의자의 등받이가 표현되고, 단령의 치맛자락 트임 사이로 보이는 의복 표현이 직선으로 묘사된 점, 공수자세 틈으로 흰 소매가 내비치고 좌안칠분면의 취세를 표현하기 위해 양쪽 어깨의 기울기가 크게 차이가 나는 점 등을 보면 정사공신상인 「이시방 초상」과도 닮아 있다.
도상 형식에 있어서도 진무공신상과 차이가 있는데, 의자의 형태와 공수(拱手 : 두 손을 마주 잡음) 사이에 내비치는 흰 소매자락은 제3단계 공신도상의 초기, 즉 선무(宣武)·호성(扈聖)·청난(淸難) 공신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며, 또한 단령(團領 : 깃이 둥근 공복)의 트임 사이로 내비치는 내공(內供 : 옷 안에 받치는 감)과 첩리(帖裏 : 무관의 공복)의 나란한 배열은 시대가 조금 더 내려간 시기의 특징이다.
따라서 김완 초상은 가전(家傳)하는 바대로 효종·현종연간에 병조판서로 추증되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전라남도 영암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다.